선배들과 일찍이 판을 접고 회사 앞 저녁을 먹으러 갈때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자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고"는 말이다. 발제거리를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데스크와 취재원에 시달린 후배를 위로하는 말로 대개 '맛있는 거 먹고 힘내자'란 의미가 담겼다. 이와 함께 가장 많이 하는 또 한가지의 말이 있다. 그건 바로 "기자 인생이 노나봤자 기자지"다. 이는 내가 종사하고 있는 직군 이외에도 주변환경이 크게 바뀌지 않음을 시사할 때 사용한다. 최근 이 틀을 깨는 사건이 알려졌다.
현재 정치권 화두로 떠오른 이야기가 있다. 바로 '화천대유' 사건이다. ‘대장동 개발사업’(성남 판교대장 도시개발사업)에 참여해 수천억 원대 배당으로 특혜 의혹에 휩싸인 화천대유를 둘러싼 논란이다. 복잡한 사실관계를 뒤로 하고 눈길을 끄는 건 해당 논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화천대유는 전직 언론인 김모씨가 최대주주다. 김씨는 거액의 자산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는데 평소 출입처 등에서 마주치는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다는 후문이다.
자회사 격인 천화동인에서 배당금을 가져간 사람들도 주목을 받았다. 천화동인 4호 대표를 맡고 있는 남모 변호사는 지난 2011~2012년 대장동 민영개발이 추진될 당시 현재 화천대유와 같은 성격의 자산관리회사(PEV)인 판교프로젝트금융투자의 대표를 지낸 것으로 파악됐다. 남 변호사는 천화동인 4호에 8721만원을 투자해 약 1007억원을 배당받은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이 변호사의 아내는 모 언론사 기자로 알려졌다. 화천대유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자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뒤 곧바로 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천화동인 7호는 화천대유 최대주주 김씨와 같은 언론사에 재직했던 후배 기자다. 그는 의혹을 둘러싼 분야의 유관 출입처를 담당하던 기자였는데 투자금 1046만원으로 약 121억원을 배당받았을 것으로 추청하고 있다. 후배 기자는 지난해 9월 부산 기장군에 있는 한 2층짜리 건물을 사들였는데 해당 건물 1층에는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다. 부동산 업계는 이 건물의 시가를 약 79억원으로 추정했다.
기자들이 모여있는 단체 카톡방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 내 언론인 탭에선 각종 반응이 쏟아졌다. 특히 "기자 인생이 노났다" "존경하는 기자가 없었는데 이제부터 생겼다" 등 절대로 달라질 수 없는 한탄가득한 기자생활을 성공적으로 탈출했다는 말이 잇따라 나왔다.
이런 반응 가운데 생각을 되짚게 되는 글이 있었다. 자신을 모 일간지 기자라고 소개한 누리꾼은 "분명 이들 기자들도 처음 입사했을 때 정의감, 사명감 등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바뀌게 됐을까"라고 토로했다. 엄밀히 말하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본인 결정에 달렸지만, 사회 문제들에 엄중한 잣대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전하는 우리로썬 씁쓸함을 삼켜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매체 선배 기자가 있다. 이 선배는 편집국 사람들이 "얼굴을 까먹겠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회사보다 현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이슈를 잇단 발굴한다. 특히 매체 내 단독 기사를 가장 많이 써 매달 포털사이트 PV의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회사의 격려는 없다고 푸념아닌 푸념을 할 때가 있다. 칭찬은 박한데 조금의 실수는 아주 크게 키워 취재활동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 쌓여 "일할 의지가 없다"는 마음이 커져간단다.
엇비슷한 사례를 접하다보면 나도 "일해서 뭐하나, 그냥 줄 잘서서 부귀영화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같읕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회자될 때면, 참 힘이 빠진다. 유명 인사들이 거론돼 사건에 연루된 모습 또한 '천룡인 리그'는 절대 허물어질 수 없는 견고한 옹성이구나 싶다.
최근 대학 후배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이제 4학년 막학기를 보내고 있는 후배는 본격 취업 준비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우리가 나눈 통화 내용은 이랬다. "어차피 취준은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만 있는 거지" "맞아 취업이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데 그들이 사는 세상은 아마 없는 이야기겠지" 등이다. 이미 취업을 한 학교 선배로서 희망찬 말을 해줘야 하는데 경쟁은 의미없다는 공정하지 못한 세상을 잔뜩 경험한 뒤라 별다른 힘을 주지 못했다.
오는 2022년 대선에 출마할 후보들이 예능프로그램에 줄지어 출연해 자신의 아주 어린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고기를 먹어보지 못했으며 상하기 직전 과일을 한번에 다먹었고, 차가 없어 산을 오르내리며 등교했다는 눈물없이 듣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적잖은 사람들이 현재 최상위층인 당신들의 어린시절과 비슷한 삶을 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과거를 회상하기에 지금 당장 누리고 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천룡인이지 않은가.
안그래도 '기레기'란 말이 기자가 되면 매우 당연히 듣는 단어로 자리한 가운데 몇몇 선배들의 파격적인 행보로 후배들은 더 깊은 한숨을 내쉬게 됐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어차피 바꿀 수 없다면 주류에 편승되는 선례를, 단순히 혀를 끌끌 차며 비판만 하기엔 '나만 바보인가'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