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홈페이지를 만들고 싶었지만 금전적인 문제가 있었다. 가난한 유학생이 트래픽을 관리할 많은 돈을 단번에 쏟아붓는 건 무모했다. 하여 아주 간편하면서도 접근성이 용이한 블로그를 취재팀의 '근거지'로 삼았다.
가장 중요한 건 취재팀의 이름이었다. 점심 즈음에 모인 우리는 5시간이 지나도록 이름에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참다 못한 나는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섰는데 스치듯 한 이름이 떠올랐다. 우린 전 세계 청년들을 취재할건데 세상은 아주 큰 퍼즐이 아닌가. 그 퍼즐 위에 한 조각이 청년을 의미한다는 뜻에 'APOP(A Piece Of Puzzle)'이 탄생하게 됐다.
원래 인터뷰는 지인부터 시작하는거라고 배웠다. 곧장 한인교회에서 친하게 지내고 있던 한 청년을 섭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질문 따위는 없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체의 삶을 들어보고 싶었다. 이 방법은 훗날 글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내가 인터뷰를 할 때 여전히 써먹는 방법이다. 일을 위해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대면을 하지 않고, 눈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눈다. 물론 녹음기를 돌려가는 수고스러움이 더해지지만 이렇게 해야 교감하는 인터뷰가 나온다.
어쨌든 첫 인터뷰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 콘텐츠는 약 60명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주변으로만 인터뷰를 섭외하는 건 한계가 왔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커뮤니티 등을 돌아다니며 인터뷰에 적합한 청년을 찾아다녔다. 거절도 당하고 예상치도 못한 일이 발생해 쓴 잔을 들이켜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모든 과정들이 즐거웠다.
타지에서 글로 뭘 좀 해보니 자신감이 붙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잊고 있던 한국의 현실은 귀국과 동시에 나를 찐하게 찾아와주었다. 귀국 직후만 해도 나의 전공은 아직도 생물학이었다. 이 공부에 이골이 났던 난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했다. 자연스럽게 성적은 바닥을 쳤고 다시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에 갇혀버린듯한 나날이 계속됐다. 동력의 속도가 아주 미미한 수준까지 떨어졌을 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사회공헌추진팀 기자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