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직장인을 향해 우리는 'E 음계를 쳤다'고 말한다. 이건 삼성이나 카카오를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많은 급여를 받고 복리후생이 좋다고 해도 갖가지 불만이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이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이 빠르게 지나가는 걸 아쉬워 한다. 오늘 신년회의를 마치고 회사를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회사가 저멀리 보였는데 대뜸 회사가 자랑스러워 보였다. 아주 단단히 'E 음계를 쳤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전 직장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하루하루가 얼른 끝내버리고 싶은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를 그저 하나의 '나사'쯤으로 취급하는 편집국 덕분이었는데 선배, 후배 어느 누구 하나 밝은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나의 이직이 결정된 날, 부럽다고 말하는 선배들의 표정이 그렇게 살아있을 수 없었다. 아무튼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니 참 서글프지 않은가. 그래서 경력 이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경력직 채용 공고를 매일 쳐다 봤다. 이제와 밝히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선후배들이 꽤 있었다. 심지어 나와 함께 들어온 입사 동기도 점프를 시도했단다. 지난해 내가 나가기 전까지도 적잖은 선배들이 이탈했으니 근무환경과 분위기는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기자는 일반 직장인과 근무환경이 다르기에 '워라밸'을 따지는 건 좀 웃기긴 하다. 그래도 지난 올림픽을 우린 떠올려야 한다. 여자 배구 경기에서 잇따른 실책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을 때 캡틴 김연경 선수의 리더십이 빛을 발휘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 가운데 놓여있어도 좋은 리더를 만나면 팀원들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나서기 마련이다. 전 직장은 모든 선배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발제 나와바리가 침범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기 바빴을 뿐, 후배 성장을 위한 진심어린 조언 등은 아끼고 아꼈다. 라인으로 뭉쳐진 선후배 관계만 챙겼고 거기에 들지 못하는 구성원은 철저히 배척했다. 이런 환경 속 십년을 넘게 근속한 선배들이 있었으니, 내가 '근성'이 없구나 결론을 지어보겠다.
이직을 한 뒤 데스크가 아주 비싼 고기를 사주시며 말씀해주셨다. "직장은 어딜 가든 모두 똑같다"고 말이다. 기대를 잔뜩 품고 점프해온 후배에게 아주 쓴 농담을 던지셨다. 사실 정답을 말씀하시긴 하셨다. 어느 공동체든 고질적인 문제는 있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골머리를 던져버리기 위해 옮긴 이 회사는 내게 신선한 자극을 충분히 줬다. 아니 여전히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데스크와 팀 선배들은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취재 원하는 거 다하라"고 하셨다. 후배들에게 할 수 있는 전형적 말이다. 그런데 진짜였다. 좋은 기사를 쓰면 그만큼의 브랜드가 구축되는 것이 언론계인데 선배들은 어떤 발제를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후배에게 기꺼이 그 발제를 던져주셨다. 나를 높이기보다 함께 높아지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협력도 많이 했다. 덕분에 기자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은 '공동 바이라인' 기사를 출고했다.
선배들의 아낌없는 지원 속 나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걸 '잘했다' 생각하게 됐다. 오늘 퇴근을 한 뒤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잇따라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보니 회사 방송 프로그램의 PD였다. 내가 작성한 기사에 대한 후속 취재를 위한 몇가지 요청을 했다. 별안간 다시 전화가 울리더니, 이번엔 타 부서 선배가 한 국회의원에게 내 번호를 넘겨줬단다. 또 그 기사였는데, 관련해 법안 발의를 준비하려는듯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했다. 이후 의원실과 통화하며 향후 대처 방안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 이야기를 취재원에게 해줬더니 "감사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감사를 받자고 작성한 기사는 아니었지만 기자가 세상에 필요한 이유를 곱씹게 됐다. 물론 날카로운 칼을 여기저기 들이미는 역할이 계속되지만, 누군가는 전해야 하는 이야기를 객관적이고 진실하게 써내려가는 것 또한 책무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취재하는 과정이 힘들고 지치지만 이같은 움직임들이 방송 제작, 법안 발의 등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고등학생 때 줄곧 외쳤던 '세상을 변화시켜보자'는 말을 실천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직을 하겠다는 나를 붙잡고 "옆으로 나아가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이탈을 반대하던 전 직장 선배가 떠올랐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주 미세하지만 스스로 뿌듯하며 만족할 수 있는 보폭의 방향이 옆은 아니란 점이다. 오늘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벌써 지나쳐온 뒤를 까마득하게 돌아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런 마음에 어둑해진 거리 가운데 환하게 빛나는 회사 간판이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