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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Feb 01. 2022

이제야 뒷좌석에 앉으신 아버지

아버지 차는 아무런 생각 없이 타는 이동수단에 불과했는데 '차주'가 되어보니 기름값의 무게는 꽤 무겁다.

지난 주말 코로나19로 약 3년간 뵙지 못했던 외할머니 요양원을 찾았다. 현재 정책에 따라 요양원에 들어가는 건 금지돼 정문 앞에서 유리문을 두고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을 위해서 삼촌, 이모, 조카 등은 부랴부랴 시간을 맞춰 요양원 앞으로 속속 모이기로 했다.


불효자인 아들은 기자가 되고 나서 가족 휴가를 쫓아간 적이 기억을 곱씹어 보면 아득하다. 이번 겨울 휴가도 임직원 리조트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마음을 함께한 바 있다. 이렇게 열심히 치인 탓에 설 명절은 물론 주말도 당직에 걸리지 않았다. 이에 기쁜 마음으로 울산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으로 떠나기 약 일주일 전 아버지의 손에 문제가 생겼다. 주변이 돌처럼 단단해지고 손등은 부풀어올랐다. 한의원도 다니고 마사지를 하니 가라앉는 듯 했으나 증상은 다시 악화했다. 병원을 찾았더니 혈전이란 진단을 받았다. 평소 운동을 조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잠을 청하지 않으셨는데 이같은 일이 발생하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결국 이번 여행에서 운전은 내 역할이 됐다. 아버지는 번갈아가며 운전을 하자고 말씀하셨지만 아들 된 도리로 어떻게 그러나. 나는 집을 나선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에게 운전대를 넘겨드리지 않았다. 왕복 8시간에 부산과 울산 시내를 돌아다닌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여행 전날 당직의 여파가 꽤 남았었는데 그래서인지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커피를 4잔쯤 부어라 마셔랴 한 기억이 있다.


운전을 하며 뒷좌석에 어머니와 앉아 있는 아버지를 힐끔거리며 봤다. 언제나 나보다 더 큰 존재로 청춘이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보다 더 왜소해지신 듯 했다. 팔이 아프셔서 어머니와 계속 주무르고 계셨는데 그 모습에 아들로서 당장에 더 큰 조처를 해드리지 못한다는 게 한탄스럽기도 했다. 이제 정년을 곱씹으면 한 손가락에 들어오는데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린 세월이 야속했다.


문득 아버지의 무게가 떠올랐다. 내가 고3 때 도서관에 가방을 던져놓고 한참 놀때 아버지가 간식을 가져오신 적이 있다. 당시 근처에서 놀고있던 나는 아버지의 간식을 받기 위해 잠깐 도서관에 들렀는데 열람실에 간식을 두고 다시 나가려 나온 찰나 그 아래로 도서관을 나가는 아버지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그 뒷모습이 종종 떠올랐는데 내가 큰 불효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최근 동생이 진로를 확정 짓기 까지도 시험장 앞에서 추위를 무릅 쓰고 마음을 졸이신 분이다. 그만큼 자식을 포함해 가족을 위하여 한 몸을 희생해오셨다. 이번 여행에서도 늘 명절만 되면 가족을 이끌고 수십시간을 운전하셨을 텐데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서 비롯된 가장의 무게였다.


동생의 진로가 결정됐던 날 아버지에게 '두 자식이 성공한 기분이 어떠냐'고 여쭤봤다. 우스갯소리지만 그 날 이후로도 틈이 날 때 이 질문을 계속 던졌다. "감사하지"란 말 외에 어떤 특별한 답변을 전해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부모님의 어깨에 과한 뽕을 넣어드리고 싶었다. 성공이란 말이 상대적이지만 자식은 '가난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을 내뱉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신 부모님께 나와 동생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우리의 전략이 먹혔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지방 일정을 보내며  얼굴이 화끈거리는 순간이 많았다. 부모님의 지인을 만날 때마다 '아들은 기자고 딸은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자랑섞인 말이 잇따라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냐" 말하고 동생은 "그게 부모 마음이다" 핀잔을 . 내가 정말  마음을 몰라서  말은 아니었다. 새삼 평소 티를 전혀 내지 않으시는 부모님이 자식들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지   있는 시간이 됐다.


잘나가는 사람들처럼 부모님에게 한강이 보이는 집이나 기름값 걱정하지 않고 탈 수 있는 고급 외제차를 선물할 수 있는 깜냥은 아직 안 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기자라는 직업을 계속 한다면 불가능하다. 그래도 몇개나 되는 내 옷장을 바라보며 이제는 내것이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의 옷을 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 매번 손을 가로 저으시며 나를 말리신다. 최근에도 아버지가 즐겨 입으시는 브랜드에서 넥타이를 구입해 드렸더니 "이제 넥타이가 너무 많으니 더 이상 사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이 말을 하기에 아버지 옷장은 너무 단출하다. 물론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옷장 속 옷걸이의 갯수가 그동안 그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 아니겠는가 싶었다.


지난 주말로 돌아가 과거 호탕하게 웃으시며 손주들에게 용돈을 건네시던 외할머니가 이제는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이 불편한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었다. 인간은 그렇게 늙어가고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막연하게 느껴지던 이런 것들의 무게가 이제는 내게로 향해올 때 난 잘 준비돼 지혜롭고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꼭 거대한 준비가 필요한가 싶기도 하다. 8시간 운전이 필요할 때 바로 투입할 수 있는 팔과 다리, 커피 서너잔만 있으면 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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