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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Feb 14. 2022

방구석을 벗어나지 못했던 글쟁이

모두가 잠든 새벽, 때론 빗소리를 들으며 써내려갔던 나의 글들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Paul 제공

군복무를 하기 전 진로에 대한 불투명함과 사람 관계의 회의감으로 이골이 났었다. 이대로 군대에 보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셨던 부모님은 나를 유럽 패키지 여행에 던졌다. 22살이 막 시작됐던 1월 즈음이었는데 내가 그 좋다는 유럽에 가서 한 일이 뭔지 아는가. 아주 유명한 관광지니까 휴대전화로 사진 딱 한 번 찍고 다시 버스로 돌아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버스가 없을 땐 다시 모이기로 한 약속 장소 근처 벤치에서 멍을 때렸다. 에펠탑을 올려다보는 유람선 안 제일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니 당시 내 여행 태도가 어땠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부모님이 현대에 맞지 않은 꽤 구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구식이었던 것 같다. 전역을 하기 약 3달 전 아버지가 부대 앞으로 찾아와 시드니에 다녀올 것을 권유하셨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이, 극구 손사레를 치는 내게 "이번이 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하신 것이다. 무턱대고 해외에 보내달라는 철없는 자식은 있어도 한사코 가지 않겠다는 자식을 수일 동안 설득하는 부모가 어딨나. 난 이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설득에 못이겨 전역한 지 5일 만에 인천국제공항 앞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앞선 글들을 통해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과정을 거쳐 비영리 취재팀 활동을 하게 된 나는 어학연수 생활을 비교적 잘 보냈다고 생각했었다. 그냥저냥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을 누구보다 알차게 채웠다고 자부헀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고 인터뷰를 하러 집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로 출장 아닌 출장을 가기도 했다. 왜 호주에 왔는지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할 수 있는 영예를 누리니 정작 기자가 된 지금 이 시기 만큼 열정적으로 취재를 하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인터뷰를 했으면 마감을 해야 하는데 이걸 어디서 했느냐. 바로 집이다. 당시에 나는 외국인 쉐어하우스에서 베트남 출신 대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나도 저녁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터라 낮시간은 짬이 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들어와 어딜 나가자니 시간이 늦었고 눈이 초롱초롱한 밤에는 어수선한 쉐어하우스 분위기로 무언가에 몰두할 수 없었다. 결국 모두가 잠든 새벽이 내가 주로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쓰는 시간이 됐던 것이다.


그래도 주말엔 밖을 좀 나가면 되는데 호주 어학연수 당시엔 내가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경치나 분위기가 좋은 카페를 찾아다닐 생각도 못했다. 2년 전 코로나19로 전세계에 봉쇄령이 떨어지려던 찰나에 다녀온 시드니에서 '듁스' 원두의 커피를 마시며 어학연수 때 줄기차게 오지 못했던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여하튼 좀처럼 방구석을 나가지 않았던 난 귀국하기 전날에도 집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이왕 쓰기로한 글, 노트북을 들고 시드니 구석구석을 다녔으면 좋지 않았을까 문득문득 떠오르는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다.


방금 언급했던 2년 전 시드니 방문으로 돌아가보자. 대학 졸업을 1년 앞둬 머리가 좀 컸으며, 가족과 해외여행도 잇따라 다녔던 난 이번엔 최고로 잘 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추억에 젖어 공부하며 다녔던 장소들을 다시 찾은 뒤 새로운 어딘가를 찾아나설 흥미를 잃어버린 날 발견한 바 있다. 약 2주 동안 머물렀었는데 이 시간이면 주말에 단 2.5불을 내고 트레인으로 '블루마운틴'을 가거나 최고 관광지라고 꼽히는 '울릉공'을 방문할 수도 있었다. 어학연수에서 귀국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갔던 '패딩턴마켓'을 2년 전 여행 마지막 날에도 또 갔으니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구나 아주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더란다.


사실 지금 당장 사표를 내고 호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다. 그럼 당장 시드니공항에서 익숙하게 휴대전화를 개통한 뒤 어학연수와 2년 전 여행에서 버리지 않고 사용한 교통카드에 50불을 충전해 어디든 쏘다니겠지.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면 심심함이 잔뜩 쌓여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의미없는 한숨만 토로할 게 뻔하다. 비로소 현재 삶에서 벗어나고픈 한 직장인의 목적없는 '즉흥'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후 한국에 두고온 가족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다가 귀국행 티켓을 결제하지 않을까.


방구석에서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시드니에서의 새벽 시간은 내게 또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세상에 둘도 없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줬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나서봤으면' 하는 미련과 '다시 한 번?'이란 간 큰 마음이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꼭 역사를 만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행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시간인 건 아니지 않나. 아무도 알아주지도 찾지도 않는 지방 촌구석에서 내 삶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다면 '메이저'가 주는 즐거움과는 또다른 동력이 나를 이끌게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런 맥락으로 '무(無)'로 돌아갈 호주행은 열린 결말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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