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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Feb 26. 2022

후회하지 않으려는 친구의 선택

설레는 여행을 시작하게 해주는 건 큰 비행기 맨 앞을 책임지는 조종사다. Paul 제공

얼마 전 동탄에서 스케줄을 마치고 친구와 밥을 먹은 바 있다. 공무원인 이 친구는 코로나19로 주말까지 근무를 하며 꽤나 지친 모습이었다. 가장 큰 사이즈의 족발을 시켜놓고 우리는 쓴 현실을 곱씹는 어른들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윽고 돼지 앞다리에 살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언제 퇴사하냐"고 내가 물었다. 그러자 3주쯤 뒤에 라고 말하며 출국은 그보다 한달 뒤인 4월이라는 친구의 답이 돌아왔다. 결국 가게 되는구나 아쉬움과 섭섭한 마음이 교차했다.


이 친구는 나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간을 보낸 그야말로 동네 친구다. 같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독서실에 둘러 앉아 이리저리 놀 궁리를 같이 했다. 대학을 고민해야 했던 고등학교 3학년 때도 도서관에 가방을 던져둔 뒤 서울투어를 다녔다. 이후 다른 전공으로 같은 대학에 진학한 우리는 틈만 나면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만나서 놀 때 우리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특히 꿈에 관련해서는 더욱 그랬다. 이미 세상에서 그와 관련한 것들로 한껏 치였는데 굳이 더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다.


26살쯤으로 기억한다. 구체적인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성큼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동안 놀았던 것에 비해 비교적 쉽게 미래의 길을 내뱉었다. 나는 글을 쓰는 직업, 친구는 조종사였다. 각자 나아가고픈 길은 명확했기에 관련 분야의 포트폴리오를 성실하게 쌓아올렸고 다른 취준생들보다 퍽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인턴에 뛰어든 난 이후 길이 잘 풀려 빠른 기간 내 취준생 신분을 벗어났다. 친구 역시 외국 유학으로부터 얻은 갖가지 어드벤티지를 활용해 조종사의 꿈을 준비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시작되며 산업 전반을 흔들리게 만들었고 특히 항공 분야에 큰 타격을 줬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우려한 나라들은 문을 걸어잠궜고 수많은 사람들도 이 여파를 피하기 위해 국내여행도 나서지 않았다. 이에 해당 분야에서 근무하거나 할 예정이던 내 지인들의 피해는 상당했다. 한 지인은 입사를 전제로 한 교육을 모두 마쳤음에도 채용 취소 사태가 벌어졌으니 산업의 추락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윤을 셈해본 항공 분야 기업과 학교들은 장기적으로 다가올 타격을 고려해 신입을 받지 않았고 이 길에 대해 오랜 기간 준비했던 친구는 결국 현실을 택하게 됐다.


어쨌든 나이가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어디라도 적을 둬야하지 않은가. 그래서 친구가 선택한 길은 공무원이었다. 노량진으로 가기 전날 밤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원하지 않는 길로 나아갈 친구의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는 이를 악물었고 그결과 초수에 공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친구는 만날 때마다 힘듦을 토로했다.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에서 온 고통이었다. 친구의 어려움을 다 알지 못했지만 정년을 생각했을 때 차라리 백수가 낫지 않겠나 싶을 정도로 이건 아니다 싶었다.


사실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 현실인가. 우리네 부모님만 하더라도 어릴적 꿈을 직업으로 삼은 경우가 잘 없다. 그 가운데 누군가 알아줄만한 직업을 가졌다는 건 요즈음 아주 큰 축복이다. 배부른 토로일 수 있겠으나 원하는 일을 하는 나로서 친구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랬다. 나아가지 못한 건 상황 탓이니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결심을 친구에게 심어준 것이 아니다. 그저 결정을 해나가는 친구 곁에서 그게 맞다는 지지를 진심으로 보내줬을 뿐. 그냥 만족하고 살 수 있지만 원하는 것을 위해 도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기 싫었던 친구는 모험에 나서기로 했다. 조종사를 위한 미국행을 말이다.


중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친구와 어느날 집 앞 체육공원에서 괜히 운동기구를 돌리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살고 싶은데 넌 어떠냐고 물었고 친구에게서 돌아온 답은 꽤나 간단했다. '글쎄, 난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란 말이었다. 이제와서 밝히지만 사실 이때 나는 친구도 그럭저럭 현실에 맞춰 다른 사람들처럼 살겠구나 멋대로 결론을 내렸었다. 이 삶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무언갈 열망하는 의지가 없어 보였던 친구 얼굴을 본 뒤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누워 낙심한 철없던 시절 내가 문득 떠올랐다. 4월에 미국으로 출국해 공부를 시작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막상 들으니 만감이 교차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약 4년 뒤인데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실없는 대화를 짧게 나눴다. 그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혹은 결혼을 해 아이가 있을까 등 당장 상상하기엔 골머리가 잔뜩 앓을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당시에 말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지난 후 친구가 평생 하고 싶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조종사가 되어 세계 각국을 누볐으면 싶었다. 과정이야 순탄치 않겠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현실 속 대안을 단 몇개월 만에 이뤄냈으니 견고히 나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 늦기 전에 말로만 끝나지 않으려는 꿈을 위한 행동에 나서는 친구의 눈은 어느때보다 맑게 보였으니 말이다. 훗날 해외여행을 친구 덕 봤다 동네방네 자랑하는 큰 그림이 완성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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