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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r 16. 2022

더 비싸도 되는 카디건

입지 않는 옷들이 가득 쌓인 내 옷장이지만 매번 방앗간을 지나지 못하는 참새가 된다. Paul 제공

지난주 어머니가 자꾸 내방에 들어와 옷장을 기웃거리셨다. 이유를 물으니 학교에서 입을 얇은 카디건 종류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우리 어머니를 설명하자면 옷을 참 좋아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옷장엔 그리 많은 옷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다할 명품도 없다. 어릴 적엔 단벌신사인 어머니의 모습이 당연하다 여겼는데 이만큼 커버린 내가 근래 어머니 옷장을 들여다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이렇게 날 키우셨구나 싶어서.


여하튼 현재로 돌아와 지난주 이야기를 다시 곱씹자면, 매일 경량패딩 하나만 걸치는 게 좀 그렇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코로나19 여파로 도서관에 학생들 방문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복도를 오가며 다른 선생님들과 마주치니 새로 하나 장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옷이 정말로 필요하셨던 어머니는 '주말에 같이 가보자'는 말을 뒤로 하시고 먼저 동생과 쇼핑몰을 다녀오셨다. 그 전날 내가 주로 입은 브랜드가 무어냐고 물으셨는데 나갔다 오신 어머니의 손엔 별다른 쇼핑백이 들려있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별로 살게 없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분명 이 회신 속에는 '마음에 드는 옷이 있었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서'란 문장이 아주 깊숙하게 숨겨져 있다.


카디건이 본래 한 시즌을 입으면 관리가 무색할 정도로 망가지는 속성이 있다. 그렇다고 빨간 하트에 잔뜩 성난 눈이 그려진 비싼 옷은 한사코 거절하실 게 뻔했다. 이에 자주 구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카디건 몇가지를 보여드렸다. 이제 50대가 넘으신 어머니는 직접 입어보지 않는 옷에 대한 불신이 있으신 모양이었다. 썩 눈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읽으며 나 역시 내키지 않았다. 적어도 내 옷장엔 이보다 비싼 카디건들이 즐비하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그래도 돼'란 철없는 생각이 아직도 은연 중 존재하는 날 발견했다. 그래서 주말이 된 뒤 곧장 어머니가 관심을 보이셨던 브랜드로 달려갔다. 한참을 둘러보던 중 한 카디건이 눈에 들어왔다. 베이지색이었는데 가격표엔 79000원이 적혀있었다. 사실 멈칫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내 내가 지난주 이곳에서 결제한 30만원 가량의 옷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직장인이라고 부모님의 한량없던 헌신과 사랑을 어느정도 헤아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녁을 드시고 계셨다. 자리를 파한 뒤 드라마를 보려고 TV를 켜신 어머니에게 카디건을 드렸다. 그랬더니 내 방 전신거울 앞으로 가 바로 입어보시는 게 아닌가. 한참을 피팅모델처럼 주변 돌고 돌으신 어머니는 가격표를 보셨는지 '너무 비싸다'는 말을 뱉으셨다. 이 말 뒤에는 항상 '돈 뭐 많이 번다고 이런 걸 사냐'는 첨언이 뒤따른다. 다음 상황은 뻔하다. 아들에 부담을 주기 싫어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갖가지 이유를 나열하시는 것. 그래서 난 요즘, 이날도 그랬지만, '하나도 안 비싼데. 너무 잘 어울리네. 할인해서 샀으니까 잘 입어~!'하고 더 이상의 대화를 받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 어머니 혹은 아버지 옷장으로 가니까.


학교 출근하면 입어야겠다고 말씀하신 어머니가 '다음에 옷사러 갈 땐 아들 따라 가야지'라고 덧붙이셨다. 대단히 크고 좋은 무언갈 선물해드리지 않았으나 오늘날에 이르러 아들을 키운 보람이 있다는 어머니의 감사가 섞인 칭찬 비스무리한 말이다. 이같은 일상을 보내며 부모님의 당연했던 역할이 내게로 넘어오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일종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가는 데 따른 두려움은 썩 많이 들지 않는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여전히 단벌신사로 출근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이전보다 더 왜소해지셨음을 하루가 지나며 느껴가는 게 어딘가 숨어있는 시간이란 놈을 야속하다 비판해주고 싶은 마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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