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ul Mar 18. 2022

후배를 대하는 선배들의 다른 자세

취열한 취재를 통해 완성된 지면은 매일 새벽 이곳에서 구독자들에게 전달된다. Paul 제공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연예인이 자신의 바로 옆을 지나갔다고 해 부산을 떨지 않는다. 소싯적 아이돌 그룹의 팬클럽으로 콘서트를 열심히 따라다닌 직원들이라도 이젠 그들을 일을 위한 파트너로 대하니 마음가짐이 변한 것이다.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단독 혹은 대단히 이슈가 큰 내용을 기사로 다룰 때 대개 '빨리 마감하고 퇴근했으면'하는 마음이 머리를 지배할 뿐이다. 혹여나 이 기사로 인해 추가 취재를 해야 할 일이 발생하진 않을까 노심초사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익숙해짐은 꽤나 서글픈 일이지만 이렇게 일선 기자들이 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정확한 취재를 했다면 뒷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데스크의 전언 때문이다. 언론중재위원회는 꼭 기사에 커다란 오류가 있다고 해서만 방문하는 곳이 아니다. 기사의 사실관계가 정확해도 그것을 부정하며 조정을 신청하거나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일이 적잖다. 그러면 이유서 작성과 조정기일 출석 등 할 일이 태산 같이 쌓이게 된다. 현장에서 고생하는 것을 뻔히 알고, 모든 기사는 데스킹을 거쳐 나가지 않는가. 이 과정을 모두 거쳐본 사람이 한 팀을 책임지는 데스크가 된다. 그래서 데스크는 후배들이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난 그런 역할 하려고 있는 거지'라는 멋진 말을 쿨하게 날리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만난 A데스크는 저 말을 할 줄 아는 선배였다. 한번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갑론을박이 일어 각종 뉴스에서 회자됐던 글을 기사화 한 적이 있다. 나는 글에 따른 누리꾼들의 반응을 정리해 기사를 출고했다. 그런데 몇 주 뒤 언중위에서 통지서가 날라왔다. 본인 의사를 묻지도 않고 글 내용을 발췌해 기사를 적었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 가입 절차를 거치지 않고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플랫폼에 글을 올렸다는 건 공론화가 되길 바랬던 것 아닌가. 자초지종을 살펴 보니 본인이 얻고 싶은 반응과 정반대의 반응이 쏟아졌고 이에 부담을 느껴 언론사들 탓으로 책임을 돌렸던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했었는데 A데스크는 내게 걱정 말라는 말을 건네고 돌아섰다. 그에 말에 따르면 이런 복잡한 일 하라고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전혀 신경쓰지 말고 일이나 하라 였다. 실제로 언중위 출석은 팀장급에서 해야 하니 아주 당연한 말을 한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뒤로 나를 포함한 선후배들이 기사 작성에 있어 어떠한 불이익이나 불호령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후 상황이 마무리됐다는 이야기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데스크와 밥을 먹으며 전해들었을 뿐이다. 데스크가 전해준 마음은 언중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게 아니었다. 후배들이 발제부터 기사 출고까지 어떤 고생을 하는 지 누구보다 잘 아는 '선배'이기에 선배가 해야 할 책무를 다한 것이다.


B데스크는 좀 달랐다. 아 먼저 기사를 어떻게 작성했는지 설명하자면, 역시 온라인에서 회자돼 사회문제로까지 불거졌던 이슈였다. 양측의 입장이 대립됐는데 난 이걸 모두 기사에 넣었고 당사자의 입장을 직접 들어보기 위해 수차레 연락을 시도했다. 물론 닿지 않았고 이 내용도 담았다. 또 정부기관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동일한 사회문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경우도 설명했다. 당시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이슈의 당사자가 관련 업계에서 활동을 재개하려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언론사들을 언중위에 제소했다. 당사자들이 원만히 합의해 오해가 풀렸는데 한쪽 입장만 부각해 명예가 훼손되고 사업에 차질이 빚어졌다는 게 이유였다.


지금은 잘 지내니 과거의 갈등은 없었던 일이다란 명제가 어떻게 성립하는 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다며 수십개 언론사에 수백만원의 보상금을 청구했다. B데스크는 대뜸 전화가 와 '누가 데스크였을 때 작성한 기사인 지 파악하라'고 했다. B데스크였다고 회신을 하니 기억을 하지 못하겠다며 일단 이유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한번도 작성한 적 없는 이유서를 보조 데스크 선배와 열심히 머리를 맞댔다. 보조 데스크 선배는 '이때 취재 다 기억나는데 문제 될 게 없지 않나. 괜히 고생한다'며 발벗고 나서줬다. 그런 와중 B데스크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언중위 제소 내용이 담긴 사진 2장을 보낸 직후였는데 아직 채 읽지도 못한 내게 '보자마자 야마를 파악하고 대응방안을 생각해야지'라는 말이 날라왔다. 이후 언중위 출석 전까지 이유서 작성을 마쳐달라는 카톡을 마지막으로 상황이 일단락 되긴 했다.


힘이 빠졌다.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이 격렬하게 전달됐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바이라인으로 출고된 기사니 어떤 문제가 있으면 책임질 준비가 됐다. 그렇지만 대체 수명의 기자들을 데리고 취재를 지시하는 막중한 자리에 있는 그 선배는 까막득한 후배가 처한 상황에서 무얼 하고 있는 지 좀 많이 서글퍼졌던 게 사실이다. 이같은 상황을 예단한 팀 선배들이 차례로 연락이 왔다. 이중 가장 선임인 선배는 자신이 소극적으로 변한 이유라고 했다. 별다른 위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선배가 언급한 '이유'란 단어에서 함축적 공감이 슬며시 전해졌다.


기자생활을 하며 당사자와 기관 등을 통해 팩트체크를 마친 기사로 인해 소송에도 휘말려봤다. 취재할 때 경찰에 수도 없이 전화를 하지만 소송 당사자로 조사 차 전화를 받아 보니 솔직히 쫄리긴 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마음을 곧바로 걷어낼 수 있었던 건 함께 취재한 선배가 '기사로 소송에 휘말리면 내가 다 책임질 테니 쫄지 말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소송에 휘말렸을 때가 이 회사를 떠나 이직을 한 뒤였는데 선배는 타 부서를 출입하는 내가 피해가 없도록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셨다. 설 명절에 이 선배에게 인사 차 연락을 드렸더니 '스스로 자신감을 놓치지 말거라. 올해도 내년도 앞으로 40년간 꾸준히 멋진 기자'란 답이 돌아왔다. 선배에게 배운 후배를 대하는 방법이다.


퇴근도, 그렇다고 대기업에서 때가 되면 시원하게 쏘는 성과급이 있는 것도 아닌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뭘까 곱씹어 본다. 욕 먹고 손가락질 받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오늘날 지금도 어딘가 자신에게 맡겨진 출입처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노력을 해가며 꿋꿋하게 역할을 해가는 선배들에게 이유를 묻고 싶기도 하다. 특히 숱한 과정을 거쳐 선임으로 현장을 누비는 선배들의 고견이 절실한 상황이다. 여러 이유로 전력을 상실한 후배에게 건네줄 수 있는 '비상약'이 뭐냐고 말이다. 부디 정직하고 성실하게 펜대를 굴리는 동력이 담긴 특약 처방을 빠른 시간 안에 받아낼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더 비싸도 되는 카디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