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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Apr 09. 2022

잃어버린 꼬부랑 혀를 찾아서

다양한 주제가 담긴 칼럼을 외국어로 공부하니 더 찐하게 이슈를 파헤치는 느낌이랄까. Paul 제공

전화영어 프로그램을 실제 가입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련이 있었다. 사실 시련이라고 표현하기도 머쓱하지만 퇴근이 들쑥날쑥한 하루하루 가운데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주도 그랬다. 새벽 당직의 여파로 퇴근 후 곧바로 침대에 뛰어들기 바빴다. 그러다 문득 내년 이맘때쯤 오늘 내 행동을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에 난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회사 전화영어 프로그램을 가입했다. 등록 과정이 이렇게 간다헀다니, 사실은 시도할 의지가 부족했단 걸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등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적절한 시간을 말해주면 원어민 테스트가 있을 것이라 했다. 스케줄을 픽스하긴 했는데 그 시간이 다다를수록 무언가 두려운 마음이 엄습했다. 코로나19 여파로 해외를 나간지가 까마득한 건 고사하고 최근까지 영어를 쓸 별다른 일이 없어서였다. 솔직히 밝히자면, 해외 분야로의 취재를 할 때 외신을 뒤져보는 일을 애써 외면하고도 있었다. 어학연수빨(?)이 떨어져 점점 낮아지는 내 영어실력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가 그 이유였다. 그래도 이미 저지른 일, 피할 수 없다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좋지 않겠나 싶었다.


자정이 다됐을 무렵 별안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국제전화 발신으로 걸려온 전화영어였다. 침을 꼴깍 삼킨 뒤 수신 버튼을 누르니 'Hi'란 아주 밝고 경쾌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우린 약 10여분간 대화를 나눴다. 그냥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웬걸,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는 데 따른 여야의 갈등을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이 외국인은 나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일상 단어도 깜빡할 때가 많은데 전문 분야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알리가 있나. 직업이 무어냐고 물을 때 기자라고 소개한 내 잘못이오 짧은 탓을 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긴 10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보이지도 않는 손짓과 발짓을 더해가며 테스트를 마쳤다. 다음날 전달받은 나의 레벨은 'ADVANCED'였다.


이 결과를 전달한 전화영어 담당자는 수업을 신문의 칼럼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다른 지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가 수두룩인데 칼럼이라니. 황당함의 연속이었지만 수많은 수강생을 스쳐간 담당자들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겠지 하며 믿어보기로 했다. 수업시간은 내가 정할 수 있었는데 맨 마지막 타임인 오후 11시 50분으로 결정했다. 적어도 오후 11시까지는 출근과 퇴근의 불확실성이 컸기 때문이다. 슬픈 현실이었지만 그래도 하루가 채 가기 전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단 10분이 있다는 게 어딘가. 감사한 마음으로 3달을 달려보기로 했다.


첫날 11시 50분즈음 책상에 가만히 앉아 전화를 기다렸다. 이윽고 걸려온 전화영어를 붙들고 10여분간 수업을 진행했다. 사실 수업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첫수업이었다.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까먹었던 단어들이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발음은 왜이런지, 자동차를 매일 운행하지 않아도 종종 시동을 걸어줘야 오래 탈 수 있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어제 수업은 그래도 어느정도 익숙해진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다. 수업 초반에 하루가 어땠는지 간략하게 나누는데 '커피를 하루에 넉잔 정도 마신다'란 말이 화두가 돼 이 이야기만 10분을 떠들었다. 외간남자와 그것도 저 멀리 이국에 사는 이와 커피를 주제로 수다들 떨다니, 세상 참 다채롭구나 싶었다.


이번주는 회사로 들어갈 일이 많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수업 시간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그럼에도 뭐라도 얻어보려고 수업 때 필요한 칼럼을 복사해 수험생 마냥 공부하고 있는 날 보면 대견스럽다 스스로 칭찬을 해주고 싶기도 하다. 어쨌든 시작한 3달, 아무리 무료여도 뭐 한가지는 확실히 배우고 끝내야 하지 않겠나. 지금 당장 특파원 발령을 받을리 만무하겠으나 일을 때려치고 해외로 튈(?) 가능성은 농후하기에 꼬부랑 혀를 되찾기 위한 고군분투를 열심히 해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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