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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Apr 13. 2022

날 구해준 취재원의 정체

카카오톡에는 지인이 아닌 사람들의 프로필이 잔뜩 포진돼 있다. Paul 제공

얼마 전 회의를 하러 회사로 들어간 날은 유독 날이 좋았었다. 나들이는 둘째치고 일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님에도 불구하고 길가에 핀 꽃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던 때였다. 다행스러운건지 이 날은 벚꽃이 만개했었고 회의를 마치고 선배들과 줄지어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가던 찰나에 흐드러진 꽃들을 꽤 오랜 시간 흘겨볼 수 있었다. 함께 꽃을 보러 갈 사람이 없다는 점은 매우 슬프지만 그보다 출근만 있는 삶에서 '퇴근'을 먼저 바라는 게 순서 아닌가 싶기도 했다.


기자들끼리 밥 먹으러 가면 무슨 말을 하겠나. 그날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곁다리 취재를 할 수 있는 발제가 없는지 밥이 나오기 전에도, 밥을 먹으면서도 토론을 이어갔다. 별안간 한 주제에 꽂힌 우리는 손이 빈 사람이 취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오전에 발제를 털어버린 내가 당첨됐는데 회사 근처 커피 맛이 가장 좋은 카페에 한동안 게으름을 피워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점심시간과 맞물려 식당 줄을 오래 서있었던 탓에 시간은 어느덧 오후 2시를 넘겼었고 마치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 보도국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본격 취재에 앞서 관련 취재원들의 연락처를 휴대전화에 저장하기로 했다. 정부기관부터 각종 회사 담당자들을 저장하고 나니 카카오톡 친구란엔 9명이 추가됐다는 알람이 떴다. 한번 취재하는데 필요한 사람이 9명이라니. 이건 그나마 양반이었다. 미리 점찍어둔 취재원이 부재중일 경우 또다른 취재원을 찾아 나서야 하고 그럼 다시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거나 새 취재원을 공유받아야 했다. 대개 복잡한 발제를 하면 이같은 일이 생기는데, 이런 발제의 기사를 마무리하고 나면 휴대전화 내 수발신탭은 어제까지의 모든 기록이 사라져있는 걸 발견하곤 한다. 이 짧은 시간만으로 수발신탭을 채울 수 있었단 말이다.


잠자코 생각해보라. 평생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던 그런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는 건 참 짜릿한 일이다. 단어가 '짜릿하다'로 표현됐을 뿐,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지 않는가. 그것도 경찰서 과장, 정부기관장, 국회의원, 회사 대표 등이면 손사래를 치고도 남았을 라인업이다. 일을 한답시고 당차게 전화를 걸어 "A매체 기자 Paul이다"며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날 보고있자면 겁이 없는건지 대견스러운건지 하여튼 독특한 밥벌이를 하는 건 분명하구나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 "기자다"고 말했음에도 별로 놀라지 않고 답변을 잇따라 내놓은 상대방도 물론 그렇다.


회의를 갔던 날로 돌아와, 이날 참 취재가 어려웠다. 야마로 잡은 산업의 기업 담당자들이 대거 부재중이었던 것이다. 한 회사의 다른 담당자를 소개받아 연락을 취해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허탕을 치는 날인가 싶어 애꿎은 커피 홀더에 화를 풀고 있을 때 산업부 출신 동기가 다른 회사 담당자 연락처를 공유해줬다. 고맙다며 연신 감사를 건넨 뒤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연결이 된 그에게 "A매체 기자인데 취재로 연락드렸다"고 말을 했다. 그런데 웬걸, 돌아온 답변은 "기자님! 저 A매체 홍보실로 옮겼습니다!"였다. 뭐랄까, 순간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 중간의 감정이 쏜살같이 스쳤다.


이후 이 직원에게 다른 담당자 연락처를 공유받았고 2시간여 만에 취재를 마칠 수 있었다. 머쓱함이 가시지 않았던 난 "다음에 꼭 커피 한잔 사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약 4분 만에 날라온 답장은 "넹ㅎㅎㅎㅎㅎ"이란 어색하면서도 이제는 같은 그룹 직원이라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동기들에게 이 일화를 말해줬더니 한동안 단톡방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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