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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Apr 17. 2022

깔맞춤 룩으로 나서는 운동

온몸을 회색으로 감싸고 운동을 나가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나이가 되어 간다. Paul 제공

헬스장이나 필라테스를 등록하려는 시도는 몇번 있었다. 하지만 스케줄이 불분명한 삶을 사는 내가 돈을 쏟아부은 것 만큼 모종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건 대단한 핑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만약 살이 뒤룩뒤룩 쪘다면 당장 달려가 입회원서를 작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계속 받으니 뱃살이 앞으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주 깊게 내쉬는 한숨이 수십킬로그램의 아령을 드는 것보다 더 낫다는 자조적 목소리를 내뱉기도.


나를 움직여준 건 다름 아닌 날씨였다. 재택을 하고 있던 이번주 어느날, 오후로 접어들었을 무렵 햇빛이 방 창문으로 강렬하게 들어오고 있음을 알게 됐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장면을 얼마간의 시간 동안 보고 있었다. 당장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면 총성 없는 전쟁터처럼 혼란스러운 세상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반대편을 보면 이런 평화가 자리하고 있었다니. 순간 회사, 현장, 집 이 3곳만 왕복하고 있는 모습이 서글퍼지기도 했다. 무기력함이 일을 하면서도, 일을 마치고 나서도 나를 지배하고 있어 규칙적인 '무언가'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퇴근 후 학교를 달리는 밤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지난해 여름쯤 시작해 꽤 오래 했던 바 있다. 커다란 대학 캠퍼스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하루 동안 다소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할 수도 있었다. 날씨가 아주 추워지면서 그만뒀었는데 최근 외투를 더이상 입지 않아도 될 만큼 날이 좋아졌으니 시도해볼만 했다. 왠지 미루면 언제 등록할지 몰랐던 전화영어처럼 하루 이틀 시간만 흐를 것 같아 이 생각을 했던 날 밤 곧바로 옷을 갖춰 학교로 향했다.


정문을 지나 학교 중간에 있는 길로 오르막을 오르는데 곳곳에 피어있는 벚꽃이 시선을 멈추게 했다. 비교적 빨리 만개를 한 꽃들은 이미 초록색 싹이 뒤덮여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꽃들은 화사한 모습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는데 거리마다 설치된 가로등이 역할을 해줘 더 이뻐 보였다. 체육대학에 다다랐을 땐 웬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온통 벚꽃으로 덮였었는데 나도 모르게 '와'하는 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꼭 누굴 보여줘야겠다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휴대전화를 꺼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언제 피고 지는지 도통 모르기에 그 찰나를 간직하고 싶었다는 감성적인 마음이랄까.


이후 아무런 생각 없이 텅 빈 체육대학 주차장을 뛰었다. 그리고 바로 옆 대운동장을 가기 위해 형성된 오르막길을 몇번이고 오르내렸다. 숨이 턱 막혀 더이상 뛸 수 없다는 몸의 신호를 감지한 뒤 학교를 내려왔다.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지나오는데 열심히 걷는 내 모습이 어느 가게 거울에 보였다. 잠자코 서서 그 모습을 봤는데 의도치 않은 깔맞춤룩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 캠퍼스를 거닐고 있던 후배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아득해졌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초췌한 나를 발견하는 걸 피하고 싶어 학교를 내려올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운동량을 보면 알겠지만 대단히 큰 챌린지로 구성된 그런 프로그램(?)은 아니다. 개운한 샤워를 위해 땀을 적당히 흘리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를 재개한 건 '규칙적인'에서 비롯된 모종의 환기를 느끼기 위해서다. 만화영화 주인공의 대사 같지만, 주차장이나 대운동장 오르막을 뛸 때 '이 몇바퀴도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되뇌이곤 한다. 사소한 것을 해내지 못하면 목표한 바를 끈기있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쉬운 명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렇게 하루 이틀 하나마나한 운동이 쌓이면 '오늘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원동력을 쥐게 되고 다음날 일과 잘 싸우는 뚝심을 발휘한다. 바람 잘 날 없는 일상 가운데 해볼 만한 투자인 셈이다.


사실 이번주만 해도 술을 마시지 않지만 '직장인이 왜 술을 찾는지 알겠다'는 말을 수차례 곱씹었다. 어디가서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몇십분 운동으로 괜찮다 스스로를 다독인 뒤 일터로 복귀하는 게 좀 웃기기도 하다. 정말로 괜찮은 게 아니라 부모님이 그랬듯, 여느 직장인이 그러하듯 '원래 그런거야'로 묻어버리는 다양한 방법 중 한가지니까 말이다. 뱃살이 잔뜩 나와도 좋으니 한숨 섞인 자조적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하루가 나에게로 도달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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