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ul Apr 19. 2022

"차 끌고 망원동 가자"던 선배

남자 둘이서 찾은 월요일 망원동의 한 카페는 어색했지만 어쨌든 좋기도 했다. Paul 제공

지난주 야심차게 준비했던 기사가 엎어진 바 있다. 이 기사를 위해 무려 4명이 하루 종일 회의를 진행하며 취재를 했다. 기사 초안이 완성된 건 퇴근이 약 1시간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후배들의 노력을 조금이라도 곱씹을 마음이 없던 데스크는 '예민한 사안'이라며 기사를 킬(kill)했다. 회사를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됐던 날, 무언가 차별화된 기사를 써보기 위해 열심히 사부작거렸는데 '허무'란 단어 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이 발제를 처음 건네준 A선배는 보도국에서 하염없이 멍을 때리고 있는 내게 다가와 "힘든 건 없냐"고 물으셨다. 보통 같았으면 "아무런 힘듦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텐데 이날은 진실을 속사포처럼 쏟아낼 용기가 났다. '힘든 사회생활'은 어느 직장인에게나 적용되는, 이 말을 하는 자에게 "야, 원래 그래. 다 똑같아"란 핀잔을 줄 수 있는 명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팀 선배들은 명제를 넘어선 데스크의 비상식적 횡포를 매일 접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었다. "선배가 딱 5년만 버티라고 하셨죠. 그런데요 선배, 지금 당장 이탈하고 싶어요"


A선배는 참 존경스러운 선배다. 늘 다양한 인사이트를 쌓으면서 괜찮은 발제가 되겠다 싶으면 어김없이 후배들에게 커피 한잔 쏘시며 스리슬쩍 넘겨주셨다. 그 발제로 영향력 있는 기사가 작성되면 모든 공은 기사를 작성한 후배에게 돌리셨다. 이같은 조력을 마다하지 않는 A선배가 입사 초기에 나와 동기들을 불러 해주신 말씀이 "5년만 버텨 보자"였다. 이 진심을 모를리 없는 후배가 '이탈'을 언급하니 A선배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셨다. 그리고 하신 한마디는 "다음주에 밥먹자"였다.


그 다음주가 어제였다. 보통 기자 선배의 '밥먹자'는 메뉴가 무엇이든 술을 거하게 마셔보자는 의도가 담겨있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A선배는 내게 "차를 가져왔냐" 물으셨다. 어차피 술을 마시지 않는 난 차를 핑계로 삼을 작정이었고 때마침 들어온 질문에 '옳다구나'하고 "그렇다" 잽싸게 답했다. 사실 A선배도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다. 그래도 만남을 성사하게 한 이유가 무거우니 회사 앞 치킨이나 고기 정도가 메뉴로 선정될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로비로 내려오신 선배는 "차 끌고 망원동으로 가자"고 하셨다.


망원동으로 가는 차안은 매우 고요할 것 같았다. 이런 내 우려를 읽으셨는지 A선배는 오고 가며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물으셨다. 퇴근할 때 주로 KBS라디오 '사랑하기 좋은 날 이금희입니다'를 듣는다고 했더니 "와 그거 말이야"하시며 비슷한 톤앤매너의 DJ를 쭉 훑으셨다. SBS드라마 '그해 우리는'이 최고의 명작이라며 맞장구치던 나와 A선배였는데, 라디오도 똑같은 프로그램들을 즐겨 들어 할 말이 많았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건지, 세상 모든 이야기를 안다고 말하는 기자가 직업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퇴근 여파로 막혔던 도로를 달리는 내내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성은 망원동에 도착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사람이 많이 없어 문을  음식점이 소수였다. 목적지 없이 걷던 우리는 맛있게 보이는 파스타집에 들어갔다. 이른바 '핵인싸'들이   같은 맛집이었고 당연히 손님들은 데이트를 하는 젊은 남녀가 전부였다.  사이에서 남자 둘이 우아하게 포크를 돌려 파스타를 먹고 있으니 민망하기도 했다. 헐레벌떡 식사를 마치고 나와 망원동 주변을 한참 걸었다. 그러다 아주 힙스러운 카페에 들어가 호주 원두 '듁스' 견줄  있는 맛을 지닌 커피를 마셨다. 완벽한 데이트(?)였다.


밥과 커피를 사주신 선배는 가족과 먹으라며 주차장에서 멀리 떨어진 닭강정 가게로 날 안내했다. Paul 제공

이날 만남에서 선배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줄 알았다. 하지만 약 3시간 동안 주고 받은 대화의 주제는 재밌는 유튜브가 어떻고, 뉴스레터 중 많이 읽힐 만한 매체의 콘텐츠가 이렇다 등 그리 중요치 않는 시시콜콜한 것들 뿐이었다. A선배는 지난주 힘들었던 마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으셨다. 다만 집에 있는 가족이 몇명이냐며 망원시장에서 가수 육중완이 사먹었던 닭강정 한박스를 포장해주시는 넉넉하고 훈훈한 인심을 안겨주신 게 전부였다.


퇴근시간이 훌쩍 지나 하나도 막히지 않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복잡하게 얽혔던 마음의 응어리가 꽤 많이 풀렸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탈을 하겠다는 후배에게 다짜고짜 이유를 묻기 보다 회사를 멀리 벗어난 '즐거운 저녁'을 함께 한다는 일종의 묘책이 통한 것이다. 후배의 마음을 잘 아는 A선배가 전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인 셈이었다. 어쩌면 어제 하루 나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하셨을 A선배는 "고생했어"란 문자를 만남이 파하고 얼마 있지 않아 보내주셨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질 수많은 시간 중 하나라는 걸 깨달은 난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렇게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렸다.

작가의 이전글 깔맞춤 룩으로 나서는 운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