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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y 05. 2022

머무르면 얻어가는 것들

책 향기는 그 공간을 더 오래 머물게 만드는 힘이 있다. Paul 제공

오랜만에 한 서점을 방문했다. 1호점을 상수에 오픈할 당시 방문했던 기억이 났는데 지금은 하나의 브랜드화가 돼 이렇게 커졌단 점이 새삼스러웠다. 서점으로 들어가니 다양한 책들과 쓸데없지만 사고 싶은 굿즈가 가득했다. 요즘 사원증 뒤에 뭘 자꾸 가져다 붙이고 있는 나는 특이한 스티커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이내 올해 몇살인 지 곱씹은 뒤 조용히 매대 앞을 떠났다.


꽤 조용한 분위기 속 많은 젊은이가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니거나 해야 할 일을 잔뜩 앉고 열심을 내는 등 다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분명 서점 안은 정적인데 이같이 소리없는 꿈틀거림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걸 보고 있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살아있음을 느껴서 그런가.


언제 다시 방문할지 모르는 서점인데 나도 책을 안 뒤적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어디 구석에 가만히 박혀 완독을 하지는 못하니 적당하게 습득가능한 책이 필요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발견한 건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이란 긴 제목의 책이었다. 무언가 깊이 탐독하고 싶은 마음에 '밀리의 서재'를 곧장 열었는데 역시나 목록에서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와닿는 문장에서 멈추리라는 생각으로 소제목을 열심히 넘겼다.


우연찮게 또 하나의 챌린지를 건네주는 건 언제나 책 뿐이다. Paul 제공

이후 책장을 부리나케 넘기던 내 손을 멈추게 만든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작성했던 '원조의 역설'과 엇비슷한 내용이었다. 각종 국제기구에서 개발도상국 국민들에게 다양한 기술 등을 전수하지만 이를 직업으로 가져가기까진 많은 장애물이 있다는 증언이었다. 정기적인 생산활동을 하려면 보다 차원이 높은 조력이 필요한데 기술을 알려주는 단순 원조 이외엔 근원적 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드는 기구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몇해 전 읽었던 '팩트풀니스'도 이런 문제점을 잘 짚어줬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많은 사례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미국 어느 지역에서 생산하는 한해 곡물량으로 전 세계 기아를 해결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대해 기아, 범죄 등이 어느정도는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일부 위정자들은 항변하기도 한다. 사실 일상을 보내며 "모두가 잘 살 수는 없다"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회피를 늘어놓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해결책이 수반되지 않은 채 수천만원을 기부했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알리는 행위도 이와 결을 같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접한 책을 붙들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치열하게 이어지니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서점에 있었을 당시는 퇴근을 한 직후라 흰색 종이에 써진 까만 건 한국어인가 영어인가 아주 진절머리가 날줄 알았는데 말이다. 환한 불빛에 이끌려 들어갔다가 그곳을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40여분이였다. 커피를 찾았던 목적이 쏟아지는 졸음 때문이 아니었다면 아마 더 오래 머물렀겠구나 싶었던, 기분 좋은 바람이 선선히 불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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