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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y 09. 2022

어느 주말의 목욕탕

가구 전문점 이케아에서 구매한 방수팩이 최고 유용한 도구가 될줄이야. Paul 제공

어제는 비가 내려 좀 추운 주말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였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목욕탕을 가자고 말이다. 이 문자를 받은 직후 나는 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잇따라 챙겼다. 폼클렌징부터 샴푸, 바디워시 등은 물론이고 초록색 때밀이 타월도 잊지 않았다. 어디를 가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Joe랑 목욕탕"이라고 답하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들과 친구의 행선지가 너무 당연하다는 시선도 덤으로.


사실 몇주 전 주말에도 혼자서 목욕탕을 방문한 바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터라 조금 잠잠해졌을 때 한번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또 연일 계속되는 당직으로 몸이 찌부등한 상태였었는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나아질 것 같았다. 피곤할 때 곧바로 침대를 찾지 않고 먼저 목욕탕을 떠올리다니,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하지 못하는 그런 행동들이 쌓여가고 있음을 인지하는 추세라고 해두겠다.


어제는 마감 2시간 전에 가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물로 계속 씻어야 하는 특성상 목욕탕에서는 현재 마스크를 쓰지 않는데 마치 코로나19가 끝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솔직히 걱정은 됐다. 만의 하나라는 상황이 있지 않은가. 사실 이런 생각도 자조적이라 말할 수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음식점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길거리를 걸으며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에게 시선을 흘겨보내고 있으니 우리는 참 알쏭달쏭한 요즘을 살아가고 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 친구와 함께 40도 정도 되는 탕에 들어갔다. 이제는 어른이 됐다는 신호는 발을 먼저 빼꼼히 담그지 않고 온몸을 곧바로 넣는 것이다. 이날도 그랬는데 뭔가 아쉬운 온도였다. 별안간 친구가 "옆 탕 온도가 더 높다"고 알려왔고 우리는 45도에 달하는 탕으로 몸을 옮겼다. 그제서야 "어흐"라는 탄식 섞인 의성어가 터져나왔다. 딱 머리만 내놓고 있었는데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친구와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각자만의 명상을 즐겼다. 이후 손이 쪼그라들때 즈음 서로의 등을 내어주러 자리를 옮겼다.


Joe와 나는 무언가 고민이 있을 때 판을 잔뜩 깔고 만나지 않는다. 그냥 집 앞 편의점에서 아주 값이 싼 1+1 탄산음료를 산 뒤 정자에 퍼질러 앉아 두서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고민을 쓱 끼워넣는 우리였다. 이날도 똑같았다. 지난번 목욕탕 방문 때 혼자여서 쉽게 밀지 못했던 등을 Joe에게 내밀었고 그는 비누를 묻혀 두어번 밀어줬다. 이윽고 그의 차례가 왔을 때 등을 내어준 Joe는 "유학길이 쉽지 않다"는 말을 덤덤하게 꺼냈다.


관련 대화를 이어가던 중 Joe는 대뜸 이런 말을 했다. 그냥 남들처럼 적당히 만족하고 살아야 하나 싶다고. 그러면서 "너는 직장도 걱정없고 그냥 이렇게만 쭉 살면 되는거네"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간 내 대답은 이랬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내가 원했던 일인가 싶다고. 그러자 Joe는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잖아"라고 했고 난 "뭐 그런 셈이지"라고 맞받아쳤다. 뒤이어 특별한 말이 오가지 않았다. 샴푸와 바디워시로 만들어낸 거품으로 뒤덮인 온몸과 머리카락을 향해 쏟아지는 샤워기 소리가 목욕탕을 가득 메울 뿐이었다.


목욕탕을 나오니 비는 이전보다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목욕탕 가판대에 바나나 우유가 없었던 탓에 같은 건물 편의점으로 두 남자는 향했다. 서로가 계산하겠다며 작은 실랑이를 벌인 뒤 깜깜한 차로 돌아와 음악을 켜놓고 한동안 바나나 우유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모든 걸 마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한시간 남짓이었다. 목욕탕 카운터에서 일러준 무료 주차시간은 5시간이었는데 말이다. 급하지도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는데. 초등학교 1학년인 8살 때부터 두 남자가 켜켜이 쌓아온 대화의 방식이구나 싶어 옅은 미소가 지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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