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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y 23. 2022

알면서 멈추지 않는 투영

학원이 마칠 무렵 자식을 데리러 온 부모들의 차량 행렬이 이어졌다. Paul 제공

일정을 가던 어느 늦은 밤, 신호를 대기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눈에 들어온 건 바뀐 초록불에 무리를 지어 건너는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그들 뒤로는 도로의 신호등보다 더 환한 간판의 불빛으로 둘러쌓여진 학원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진하게 선팅이 된 창밖으로 학생들의 얼굴을 면면히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이따금씩 보이는 표정엔 근심이 가득했다. 학교를 마친 뒤 곧바로 학원에서 공부하고 와 피곤한 건지 아니면 하기 싫은 공부를 참고 해야 하는 처지를 비관하는건지는 어찌 알 수 있으랴. 그러나 판단이 서지 않는 그들의 근심에 왠지 모를 공감이 차올랐다.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는 다리 건너편에는 다가오는 6월 지방선거를 위한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후보로 나온 자의 큼지막한 얼굴과 함께 누가봐도 쉽게 이행할 수 없는 공약들이 기재돼 있었다. 순간 "저게 성공하는 거지"란 말이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성공의 모습을 정형화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는 걸 안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딱 한 번 당선만 되면 돈, 권력, 명예 3박자를 고루 얻어 짧은 4년의 기간 동안 적어도 손자세대까지는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최고의 직업(?) 아니겠는가.


밤 10시가 넘도록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이유를 자식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좋은 직장을 얻으려면 명문대학에 가야한다는 부끄러운 진실을 꿈이란 포장지로 열심히 감추기에도 바쁘니까. 차라리 선출직 의원들에게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에 대한 컨설팅을 해달라고 매달리는 게 목적 실현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모든 부모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 가운데 자식에게 투영한 소망이 완전히 깨끗하다 자신있게 선언한 경우를 이제껏 보지 못했다.


초등학생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지만 우리집도 여느 가정과 똑같았다. 선수과목을 줄지어 이수하는 등의 유난을 떨지 않았지만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면 꽤나 눈치가 보이는 환경이었다. 이르게 찾아온 사춘기 여파로 시험을 치르면 평균 90점이 넘지 못하는 때가 많아졌는데, 4과목 평균이 88점이던 시험에선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이 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 입시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별 것 아닌 '놀이'에 불과했으나 그땐 세상이 두쪽으로 갈라질 만큼 창피하다고 여겼었다. 부모의 의중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별다른 의사결정권이 없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부모님은 "장남에 대한 기대가 크다"며 부여해준 진로에 필요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다. 형편이 대단히 좋지는 않았지만 방학 특강을 위한 학원에 보내거나 의대 재학생이 가르치는 과외를 시켜주셨다. 어쨌든 의료인이 돼야 한다는 생각은 절대 꺾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현역 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하는 아들에게는 "연고대 이하는 대학이 아니다"는 말도 주기적으로 하셨다. 어찌어찌해서 생물학과를 들어가자 곧장 의학전문대학원이나 약학대학 진학에 필요한 계획을 짜라는 채근이 날라오기도 했다. 이렇게 키운 아들이 군대에 가서 한다는 소리가 "글을 쓰겠다"였으니 여태 묻지 않았던 당시 심경은 어림잡아 짐작 가능할 것이다.


내 자식은 행복하게만 자랐으면 좋겠다는 말을 친구들과 줄줄이 모여 나누지만 실현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 치고 주요대학을 나오지 않은 이 없으며 내노라 하는 직업을 갖지 않은 자 없기에 그렇다. 나조차도 "어떻게 자라든 태어나면 무조건 영어부터 가르치겠다"고 말하고 다닌 바 있다. 어른의 욕망을 자식에게 빛좋은 '산물'로 물려주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내면서도 말이다. 영어를 잘하면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걸 어학연수 기간 동안 뼈져리게 느껴서가 이유가 되겠는가. 이 말은 단지 '부모가 그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란 명분을 쌓기 위한 빌드업(Build-up)에 불과하다.


사회를 구조적으로 바꾸는 건 불가능하단다. 주류의 '의지'가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개별로 들여다볼 수 있고 자주적 성질을 꾀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 정체성이 있는 자아들인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나름의 답을 갖고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의지를 갖고 용기 있는 도전을 마다하지 않아 진심으로 하고 싶고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택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거창한 '다음 세대'가 아니더라도 부모로서 이전과 다른 시도를 해볼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다. 그토록 싫어했던 "어쩔 수 없다"를 물려주느냐 여부는 누구도 아닌 내 의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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