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간 열심히 글을 썼던 한 대기업 사회공헌추진단에서 최근 계열사별로 팝업 부스를 잇따라 설치하고 있다. 우리 회사와 가까운 계열사에는 화요일부터 설치됐는데 마지막 날인 오늘 부랴부랴 부스를 방문했다. 오늘 부스 당직자는 나와 한 사업을 오랫동안 담당했던 분이셨다. 이 공동체를 떠난지도 햇수로 3년이 흘렀고 마스크까지 썼으니 나를 당장에 알아볼리 만무했다. 밝은 인사와 함께 내 이름을 말하니 그제서야 "Paul님!"이라며 환하게 반겨주셨다.
정신없던 회사 로비 한켠에 우두커니 선 우리 두 사람은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놨다. 특별한 주제는 아니었다. 그동안 어떤 직무를 맡았는지, 취업의 과정은 힘들지 않았는지 등 시시콜콜한 것들이 전부였다. 한참을 이야기가 오가던 가운데 당직자는 내 사원증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러고선 "세월이 참 많이 지났다"는 여운있는 말을 던지셨다. 이어 "꼬박 5년이 흘러서 이제 경력 입사란 단어를 말하고 있다"고 덧붙이셨다.
아무런 걱정 없이 매우 순수하게 열심을 내어 일하던 내 모습이 어렴풋이 스쳐갔다. 이같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당직자는 "Paul님 글이 참 좋았는데"라고 언급하셨다. 이유를 보자니, 지난해 홍보 직무를 맡았었는데 블로그 등 그룹 채널에 올리기 위하여 사업을 취재한 글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사업의 모습을 그냥 나열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Paul님은 그것들을 통해서 진짜 보고 느낀 점을 함께 써줬는데 말이에요. 그때부터 기자 정신이 있었던 건가"라고 웃으며 말했다.
참 보잘 것 없는 나를 이렇게 기억해주는 이가 있다는 점이 새삼 감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안이 벙벙했다. 문득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보도국으로 돌아가 당시 활동할 때 적었던 글들을 훑어봤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현장들을 어떻게 다녔는지 곱씹을 수 있었다. 지하철로 왕복 4시간을 가야하는 거리라도 힘든줄 모르고 현장을 찾아가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으니 현재를 누려야 한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추억에 잠길 때 센치한 말들이 잔뜩 나오지 않나. 물론 실제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와 엇비슷한 마음을 담아 당직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받은 답변은 꽤나 특별했다. 아까 만남에서 펜싱하는 그 드라마를 봤냐는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당직자는 스치듯 넘겼던 드라마를 떠올렸는지 "내 마음 속 백이진 기자는 Paul님입니다"라는 회신을 주셨다. 오늘 오후 시간대의 하늘은 무척이나 흐렸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지만 막상 비는 내리지 않던, 그러면서도 습도는 기분 나쁜 정도가 천장을 뚫을 것처럼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상쾌한 무언가를 느꼈다.
이후 남은 하루는 부산스러웠다. 원래 들어가지 않아도 될 회사를 간 건데 무슨 일이 몰리는건지. 노트북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6시가 훌쩍 지났었다. 가방을 싸고 터덜거리며 구내식당으로 내려가 밥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24.5도로 맞춘 에어컨을 틀고 방송시간이 약 1시간 정도 남았던 '사랑하기 좋은 날 이금희입니다'를 배경음악 삼아 집까지 달려왔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이런 짧은 소중한 일화로 덧씌워 버텨가는 건가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