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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Aug 01. 2022

삶에 최상급 양념을 얹고 싶다면

책을 보면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게 그래도 글로 문학사를 받았구나 싶다. Paul 제공

요즘 퇴근을 한 내 모습을 복기해봤다. 일이 마치는 오후나 저녁 늦은 시간에 집으로 들어와 일단 씻는다. 그리고 침대 혹은 소파에 누워 휴대전화 잠금화면을 푼다. 이후 유튜브, 페이스북, 네이버 뉴스, 웨이브, 티빙, 넷플릭스를 차례로 돈다. 이 루틴은 잠들기 전까지 계속된다. 새벽 출근일 때도 분명 잠에 들어야 하는 시간인데 그냥 자기 아쉬운 마음에 휴대전화를 놓지 못한다. 아 물론 새벽인 걸 감안해 유튜브와 페이스북 영상 이 2가지로 압축해 조진다.


주말에도 다를 바 없었다. 스케줄이 있기 전까지, 그리고 스케줄을 다녀온 뒤 침대에 눕거나 소파에 눕거나가 바뀔 뿐이었다. 어느날은 이런 생활 패턴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와 진짜 너무 할게 없네'란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차라리 대학교 때도 하지 않았던 과제가 엄청 많이 주어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직장인이라는 핑계로 게으름을 합리화한 내가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불과 취준생일 때만 하더라도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탐탁치 않게 여긴 바 있다. 인간은 참 오만하다는 걸 지금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지만 난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 전용 e북으로 전락한 아이패드 미니로 책을 읽는 것이다. 지난해 책을 본격적으로 읽고 싶어 큰 아이패드를 어머니에게 양도하고 새로 구입했었다. 가족 모두 책을 좋아하니 이 취미를 이어가기에 무리는 없었다. 다만 가족 가운데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자가 나뿐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글과 씨름했는데 비로소 쉬는 시간에 남이 쓴 글을 공들여 읽어야 한다는 게 좀 이상하다 여겨졌다. 이에 멀리했던 것이었다.


지난 2019년 겨울 인턴이 끝난 뒤 다음해 5월 입직하기 전까지 난 완전히 책에 빠졌었다. 고3 때도 가지 않던 집 앞 도서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책이 무거워 휴대하기가 어려운 일이 종종 발생하자 당근마켓을 통해 아이패드 미니2를 구매해 책을 읽어 나갔었다. 지난 2020년 2월 베트남과 호주 등 해외일정이 잇따라 있었는데 여기에 빠지지 않고 아이패드를 챙겨 꼬박 1시간 정도는 투자해 책을 읽었었다.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 대견한 시간이었다.


난 목표로 잡은 걸 꼭 이루려는 성격이 있는데 책을 읽기 시작한 무렵 미국의 세인트존스대학교 커리큘럼을 접했고 학년별로 구성된 목록을 하나씩 지워갔었다. 주로 철학책이었는데 평생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 어려운 내용들이 무척 재밌었다. 족히 수백년, 수천년 전에 쓴 책인데 오늘날 적용되는 지혜들이 포진돼 있어서다. 취업을 앞두고 다양한 고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풀어가야할지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들을 제공받았다. 해당 과정들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혁혁한 공이 아니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오늘 다시 아이패드에 깔려있는 도서 앱에 접속한 이유는 이랬다. 호주 어학연수 시절 매 끼니마다 탄산음료를 먹었다. 기름지고 느끼한 걸 잡기 위해서 마셨었는데 어느 순간 탄산 음료 본연의 맛이 느껴진다라고나 할까. 더 이상 아무런 맛도 알 수 없는, 그저 공장에서 찍어낸 첨가물이 온전히 전달되기에 이르렀다. 과함이 불러온 결과물이었다. 퇴근하고 잠들기까지 아무런 할 일이 없어 너무 여유로운 게 아닌가 하는 요즘 나의 생활에 꼭 들어맞는 예시였다.


이런 결심이 재차 들었다고 해 얼마나 오랜 시간 아이패드를 붙들고 잠자코 밑줄을 그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는 하다. 그러나 정체됐다며 우울감을 배포하고 있는 일상의 여러 모양새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려면 책 앞에 파묻혀야 한다는 최고의 경험을 이미 마친 바 있다. 주저리 써내려가는 이 글들도 더 고급진 양념으로 꾸며내려면 아무래도 필요한 과정이다. 방학이라 치면 아직 한달여 남았으니 적어도 9월이 다가오기 전 4권은 털어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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