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농구 좋아하세요?'
위의 대사는 슬램덩크 1권에서 채소연이 강백호를 처음 만난 날 했던 질문이다.
그리고 강백호는 이 질문에 대한 진심 어린 대답을 채소연에게 마지막 산왕전에서 하게 된다.
물론, 만화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때의 강백호의 대사가 농구를 좋아한다는 건지, 채소연을 좋아한다는 건지 헷갈리지만 말이다.
나는 농구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로 농구에 대한 나의 감정을 표현하기는 좀 모자란 면이 있다.
한때는 학교를 대표하는 농구부의 선수로써 다른 학교들과 죽음의 토너먼트를 치르기도 했고, 하루에 11시간 농구를 할 때도 있었으며, 농구 때문에 안 삐어본 손가락이 없고, 현재는 무릎도 다 나간 상태이니까.. 농구에 대한 나의 마음은 뭐랄까 사랑하면서도 미움의 감정도 함께 섞여 있는 애증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니까 말이다.
누구나 무언가를 죽도록 좋아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 대상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농구가 그 대상이었다. 내가 농구공을 처음 만져본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체육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몇 년 동안 나의 인생을 뒤바꿀만한 여러 가지 심각한 일들이 있었고, 나는 그렇게 농구에 관하여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중1이 되던 해 나는 잠시 부모님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었고, 할아버지 댁으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부모님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그 시골에서 나의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 집 앞의 중학교에 있던 농구골대뿐이었다.
나는 심리학자가 아니라서 당시 나의 마음과 정신 상태가 어떠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당시 나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질병으로 요양 중이셨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뒷바라지하시기 위하여 유학을 잠시 미뤘다가 다시 유학길에 오르셨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 혼자 남겨졌던 것이다. 사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어려서 그냥 그런 마음이 당연한 것인 줄 알고 있었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화목했던 우리 세 식구의 추억을 곱씹으며 언젠가는 꼭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당시, 나는 내가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나로서 설 수 있도록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엄마도 아빠도 다 나를 떠날 수 있고, 친구도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지만, 농구는 아니었다. 그때의 나에게 그렇게 가족처럼 나를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농구였다. 그리고, 나의 결정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농구공을 끼고 살았고,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농구공을 언제나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마침 나의 농구사랑에 휘발유를 들이붓는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슬램덩크'였다.
나는 그 당시 만화책을 가까이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전학을 간 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어느 만화책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슬램덩크였다. 나는 곧바로 슬램덩크의 세계관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집안이 불행하여 불량학생으로 자랐고 또한 농구를 전혀 못했지만 서서히 농구부에 녹아들고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었던 만화 속 강백호의 스토리가 마치 나의 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 그 당시에 다니고 있던 교회의 청소년부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슬램덩크 광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농구에 있어서 만큼은 어떤 사람에게도 지지 않을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친구와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농구 이야기에서만큼은 정말 죽이 잘 맞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농구를 시작하게 된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나의 불행한(?) 현실을 잊게 해 줄 하나의 장치가 필요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이었다면 나는 지금도 농구를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 나의 농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함께 공유할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 맞추어 적절하게 슬램덩크라는 걸출한 시대의 역작이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누군가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 가지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언제나 농구를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 Top 3 안에 포함시킨다. 농구는 외롭고 지쳐 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내가 곁길로 나가지 않도록 나의 중심을 잡아 주었던 나의 소중한 친구이니까 말이다.
#슬램덩크
#농구
#좋아하세요?
#강백호
#어린시절
Q: 어린시절, 여러분이 힘들고 외로울 때 여러분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 주었던 것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