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괴물이 산다
조울증의 조증 시기와 우울증 시기를 전문 용어로 '조증 삽화(manic episode)'와 '우울증 삽화(depressive episode)'라고 합니다. 하지만 '삽화'라는 단어는 영단어 '에피소드(episode - 사건, 시기, 일화, 발생)'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쭉 해 왔습니다. '삽화'는 마치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연상시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어서, 원래 뜻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저는 차라리 사전적 의미인 '시기'나 '사건'과 같은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에피소드'라는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조증 에피소드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때로는 본인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지독하지만, 그 속에는 개인의 심리 상태나 무의식에 관한 중요한 단서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두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계속해서 곱씹는 것만 아니라면, 지나간 일을 복기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과거에 조증을 겪었을 때는 마치 내면의 괴물을 가둬놨던 감옥의 문이 열려서, 그 괴물이 날뛰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괴물의 이름은 '애정결핍'일 수도 있고, '자격지심'이나 강렬한 '욕망'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조증이 단순히 통제되지 않는 행동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감정과 욕구가 표출되는 순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조증 상태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에너지는, 평소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나 욕망을 직면하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부분에서 상처를 입었는지를 깨닫기도 합니다.
우울증 에피소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울함 속에 잠겨 있을 때, 우리는 자주 무기력과 절망에 사로잡히지만, 그 속에는 내면의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울증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삶에서 어떤 부분이 변화가 필요할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울증 당사자들은 단순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며 성숙해 가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물론, 성찰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필요할 때에는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반성하는 과정은, 병을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나아가, 조울증이라는 질병을 넘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조울증을 겪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울증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은 그 자체로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더라도, 그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자신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