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사장

R

by pq

※ 글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상당 내용은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각색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안녕. 어떻게 지냈어? 미안. 너무 오랜만에 연락했지?"


어느 날 휴대전화로 온 문자.

약 3개월 전 데이팅앱 스피드데이트에서 연결됐던 R이었다. 당시 R은 자신이 영국인이고 서울에서 바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 R과 나는 더 이상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R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3개월 만에 R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안녕. 네 말대로 정말 오랜만이네. 용건이 뭔데?"


수개월만에 연락하는 R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용건 같은 건 없어.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연락했지. 얼마 전 2주 동안 베트남에 여행 다녀왔어."


"그렇구나. 베트남 좋은데. 음식도 맛있고."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는 R에게 호응을 해 주는데 갑자기 R이 급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다음에 같이 베트남 여행 가자."


R의 어이없는 제안에 빵 터진 나는 그의 농담에 잠시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래! 언제 갈래?"


"빠른 시일 내에!"


"하하... 두고 보지 뭐."


그러자 R은 더욱더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상황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 보지 않을래? 우리 지금부터 진지하게 사귀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농담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R에게 질문을 했다.


"솔직히 말해봐. 너 혹시 최근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니?"


"하하. 나 싱글 된 지 6개월이 넘었어."


"그럼 친구들하고 내기했니?"


"하하.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단지 혼자인 게 지겹고, 여자친구는 사귀고 싶은데, 연인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 그 단계를 뛰어넘고 바로 연인이 되자는 거지."


"너는 나를 모르잖아. 나도 너를 모르고."


"그거야 차차 알아가면 되지.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내가 전화해서 직접 물어봐야 내 진심을 알겠어?"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의 1일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1일'은 아무 의미가 없지만.


R은 자신의 휴대전화에 내 번호를 '나의♡'이라고 저장했고, 갑자기 여자친구가 생기니 하루종일 내 걱정만 하게 된다고 했다. 나를 '좋아한다', '보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으며 나와 매일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라서 행복하다고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R의 발언마다 '하지만 너는 나를 아직 모르잖아'를 연발했지만, R은 '상관없어. 부정적인 생각은 금지야.'라고 일축했다.


둘째 날엔 꿈에서 내가 '사랑한다'라고 말했다며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I love you'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R은 잘 때 휴대전화를 켜놓고 '함께' 자는 것을 좋아했다. 아침에 먼저 일어나는 내가 항상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결국 우리의 랜선 상 '남자 친구 여자 친구' 관계는 실제로 만나보지도 못한 채 2주 만에 마무리됐다.


우리는 각자의 스케줄을 고려해 화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화요일 당일. 오후 3시. R은 직원 한 명이 가게에 안 나와서 자신이 대신 메꿔야 한다고 했다. 내가 R의 가게로 가겠다고 하니까 자신의 일터로 여자친구가 오는 게 싫단다. 자신은 사생활과 일을 구분 짓은 사람이란다.


우리는 다시 금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금요일 당일, 오후 4시, R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쉬어야겠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너무 무리해서 일한 탓이라고 했다. 그 전날 R은 새벽 1시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다시 월요일 저녁으로 약속을 잡았다. 월요일 당일. 하루종일 연락이 없던 그. 오후 5시쯤. 이쯤 되자 나는 이미 R을 만나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번엔 또 무슨 핑계를 댈까...' 기대하고 있는데, R이 병원이란다. 목 상태가 악화돼서 병원에 왔는데 의사가 돌팔이란다. 나는 매우 걱정하는 척하며 R에게 말했다.


"병원 어디야? 내가 갈게."


극구 오지 말라는 R.


"아픈데 혼자 있으면 얼마나 힘들어. 오늘 데이트 안 해도 좋으니까 내가 죽 사가지고 가서 간호해 줄게."


사실 자신은 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R. 그러면서 마음은 고맙지만 자기 때문에 고생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R.


병원에서 항생제까지 처방받을 정도인 R의 목 상태는 전화 너머로 들리기엔 매우 깨끗하고 청초했다.


나로서는 이번이 R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알았어. 몸조리 잘해"


"Thank you, babe."


금요일.

R에게서 문자가 왔다.


"요즘 가게가 많이 바쁘네. 자꾸 만남을 미루게 돼서 정말 미안한걸."


나는 R에게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 이번주도 어차피 못 볼 것 같아서 다른 남자랑 데이트 잡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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