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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Nov 02. 2022

<목소리의 형태>, 2) 말-소리 혹은 목소리

<목소리의 형태>(야마다 나오코, 2016)


사람은 저마다 말하는 투와 버릇이 있다. 투와 버릇은 오랫동안 맺은 관계 사건과 기운을 통해 빚어진다. 관계 맺는 자리와 틀(배치)이 만든 결과물, 변화는 자리와 틀을 어긋내는 데 있지만, 바꾸는 것, 박차고 벗어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말의 소리, 목소리는 오랜 시간을 거치고 거쳐 꼴(형태)을 갖춘다. 사람의 말-소리, 목소리는 저마다의 사연만큼 알록달록하다.




무심코 뱉은 말은 없다. 무심코라는 변명은 말과 마음이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탓이다. 마음에도 없는 말, 마음과 상관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말, 말과 다른 표정과 행동, 습관적인 말투는 마음을 내버려둔 채 보낸 시간이 만든 퇴적물이다. 둘러싼 관계와 사회의 분위기라는 커다란 틀(구조)이 자신도 모르게 행사한 폭력이자 압박 탓이기도 하다. 같은 말인데 듣는 말에 예민하거나 남이 하는 말 혹은 자기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떨지 둔감한 것은 같은 상태의 다른 양상일뿐이다. 말은 머리와 가슴을 거치지 않고 꼴을 갖추지 못한다. 머리와 가슴을 거치지 않는 말이 가능한 이유는 스스로 자기탓 혹은 남탓으로 오래 산 까닭이다.



변화의 시작은 말을 줄이는 것이다. 천천히 곱씹으면서 조금만 말하는 것이다. 급기야 입을 꾹 닫아도 좋다. 허나 누군가는 말하길 시작해야 한다. 더 나은 대화와 논쟁의 가능성을 믿고 말로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는 노력도 필요하다. 뭐든 연습이 필요하다. 머리와 가슴과 말과 삶을 가지런히 놓아야 한다. 글은 그때 거기서 솟아오른다. 애니 <목소리의 형태>는 소년과 소녀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친구로 맺은 사이가 말을 통해 어떻게 헝크러지는지를 보여준다.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살과 뼈에 감각되도록 한다. 뼈저린다는 말, 아픔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통증이 감각된다. 감각된 통증은 다시 가슴께로 내려가 아픔의 기억을 불러낸다. 애니인데도 보는 내내 적잖이 고통스럽다.


겪어야 안다, 겪은 사람만이 안다. 겪어도 모를 수 있다는 것 역시 무서운 사실이다. 당해야 연대할 수 있다. 운동은 당사자의 몫이고 연대는 당사자를 서로 잇는 육체와 마음의 고리다. 사랑이라고 부르든 우정이라 부르든 연대는 눈물겹고 고통스런 수고다. 다르덴 형제는 연대가 사라진 일상의 풍경을 무덤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허물어진 사회를 뼈저리게 전달했다. 반면에 켄 로치는 극적이다.



애니 <목소리의 형태>는 말로 찟어지고 깨진 친구 사이를 가로지르는 과정을 섬세하고 근성있게 보여주고 헝크러진 실타래가 풀려가는 전형적인 과정을 눈부시게 그려낸다. 음악과 밀착해 흘러가는 숏들에 담긴 시선의 위치와 방향, 편집은 '겪은' 이의 것이다. 말의 소리, 목소리를 찬찬히 뜯어보고 이리저리 굴려보는 연출 의도가 주는 위로가 꼴(형태)에서 솟아오르는 경험은 새롭고 새롭다. 사람은 쉽지 않다. 변화도 마찬가지다. 넋 놓고 있을 순 없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꼭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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