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섭은낭>(허우 샤오시엔, 2015)
질문이 일렁이고 출렁이는 영화가 있다. 내가 본 것을 누군가도 그렇게 봤는지, 다른 누군가는 그걸 어떻게 봤는지 확인하고 싶어 일렁이기도 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몰라서, 진짜 알고 싶어서 질문하고 싶은 영화, 누군가가 방금 본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제발 설명해줬으면 하는 영화가 있다.
허우 샤오시엔이 <까페 뤼미에르>까지 찍고 난 이후, 한 기자가 하스미 시게히코 평론가에게 물었단다.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가요?” 어떤 질문은 치명적이다. 누군가에게 ”왕가위의 영화 중?” 혹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중?”이라고 묻는 것은 친밀해지고 싶다는 표현이거나 돌이킬 수 없는 실례, 둘 중 하나다.
기자는 <밀레니엄 맘보>를 포함 그 이후의 영화 중 하나이길 바랬다고 했고 질문하고 싶은게 많았단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동동의 여름방학>이요”라고 대답했다. 기자는 당황했고, 이어지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대답, “장인이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에요, 그는 천재에요. 이 영화는 그렇게 찍고 싶다고 찍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에요!”
기자는 이어 말했다. “허우 샤오시엔의 성장영화 4부작을 같이 보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는 절교하세요. <밀레니엄 맘보> 이후의 허우 샤오시엔 영화를 같이 보고 좋았다고 한다면 역시 절교하세요.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당신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중일꺼에요.” 어떤 질문은 이토록 치명적이다.
어떤 성취는 땀과 노력이라는 시간의 절실함을 켜켜히 쌓는다고 이룰 수 없다. 직관과 통찰이라는 본능적인 능력으로 인간 한계치 너머의 어떤 세계를 이 땅에 반짝하고 드러낸 이들이 분명 있다. 동네 어디나 있을법한 47년생 이 할배가 하스미 시게코의 말에 의하면 천재(적이)란다. 어쩌면 <자객 섭은낭>도 그 목록 중 하나 일지도 모르겠다.
유명 배우보다는 이야기에, 이야기보다는 분위기나 구성에 더 끌리는 편이다. 그런 분위기나 구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배우라면 잊기 어렵다.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로 채운 영화도 좋지만, 영화의 힘은 다른 곳에 있다. 하우 샤오시엔의 영화에는 수많은 배우들이 등장한다. 수많은 등장 덕에 실은 영화가 배우를 필요로 하나 싶다. 역설적이게도 유명 연기자가 필요 없는 영화, 영화 스스로가 배우인, 영화가 연기를 하는 영화다.
영화는 결국 세상에 대한 예의입니다.
(허우 샤오시엔)
영화를 보다가 다른 차원을 경험하는 몇 번의 계기,가 있었다. 허우 샤오시엔은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다. 롱테이크가 얼마나 먹먹할 수 있고, 얼마나 따스할 수 있는지, 그의 카메라는 세상과 존재 곁에 가만히 숨 죽이고 서 있었다. 카메라로 빨려 드는 세상, 카메라를 시선으로 인식하는 계기. 멈춰섰던 그의 카메라가 움직이고, 소리가 없었던 곳에 음악이 담겼다. 가만 있어도 충분했는데 움직였던 이유, 없던 것이 있어야만 했던 이유, 시간의 흐름을 뒤집으며 씨름해야 했던 이유, 허우 샤오시엔을 본 것은 영화가 세상을 빛과 소리로 그리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었다.
롱테이크와 롱숏의 시작은 사람이 아니다. 사물 담은 공간과 생명 품은 풍광이 머금은 생동감, 멈춘 순간이 가장 뜨겁다. 멈춤과 움직임의 교차가 뿜는 정동(情動) 혹은 약동(躍動), 관조나 여운이 아니라 들끓는다. 청춘에 대한 영화가 청춘 그 자체인 영화로 탈바꿈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하찮은 말, 이 할배가 에드워드 양과 챠이밍량에게, 옆 동네 에릭 쿠에게 말한다.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혹은 “자기 길을 가게나”
나는 <펑꾸이에서 온 소년>도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