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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Nov 10. 2022

<크리드>, 원형적이면서도...

<크리드>(라이언 쿠글러, 2015)



1

쌈박질 만화책이나 영화를 좋아했다. 쌈박질이 고상해지면 무술이고 스케일이 커지면 전쟁이다. 룰이 사라지고 어둠의 길로 접어들면 패싸움에 조직 이야기가 되고, 그들을 막는 이야기는 형사물, 첩보물이 된다. 사람들이 지구상에 사라지기 전에 이런 식의 이야기는 책으로, 영화로, 만화로, 계속 반복 재생산되지 않을까? 비주얼에 공들이는 노력이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덜한 만화책은 이런 이야기를 재생산하는 가장 만만한 매체다. <권법소년> 한주먹•<용소야>시리즈(그 시절은 쿵푸소년 친미가 아니었다)•황제 아저씨가 그린 무협 만화시리즈•공태랑 시리즈(본격 학원 폭력물에 그시절 므훗한 요소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드래곤볼 무협대회(하늘로 날아오르기 전)까지•성룡류 초기 영화들(은 수련과정이 영화 절반이었다), 쌈질보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자기를 극복하고 완성해가는 것에서 어떤 매혹을 느꼈다. 지난 과거는 운동이든 공부든 즐기기보다 극기가 더 우선인 차가운 시절이기도 했다.





60~70년대 생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싸움 이야기의 매개는 '무술'이었다. 볼거리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던 시절 초등학교 앞 떡볶이 집에서 50~100원치를 시키면 비디오(VHS)를 보여주는 분식점이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소룡이 상대적으로 진지한 무도가였다면 성룡은 무술을 가지고 엔터테인먼트의 장을 열었다. 비디오 플레이어가 흔하지 않던 시절, 성룡 무술 영화는 보고 또 보고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시절 그 이야기가 몸에 새겨진 덕분인지 그 당시의 그런 단순한 스토리의 무술 쌈박질 만화에 자연스레 끌리나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에 그냥 몸이 먼저 반응한다.





2

공태랑은 무술(공수도를 한다)이라는 매개를 가지고 학원 폭력물과 성인 만화의 요소들을 아주 적절하게 짬뽕한 만화다. 이야기의 전개는 공태랑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주인공이 이상한 학교 동아리에 입학하면서 생겨나는 에피소드들. 앞의 두 만화책에 비하면 이야기는 훨씬 복잡해지고, 싸움은 학원폭력물의 형태니 훨씬 박진감이 넘치며 사춘기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성적인 묘사가 또 다른 재미(?)를 주는 만화책이었다. 폭력 수위도 차원이 달라진다. 공태랑 시리즈도, 같은 패턴으로, 계속 되는데 <공태랑 나가신다>, <신공태랑 나가신다> 그리고 <공태랑 나가신다 L>, 여러가지로 이야기의 확장을 물색하다 L시리즈에는 드디어 엄마가 등장했다. 공태랑 어머니도 닌자 출신의 고수...ㅋㅋㅋ 참 뻔한 이야기 구조인데 이게 끌린단 말이야....ㅋㅋㅋ 공태랑 역시도 매력적인 캐릭터임엔 틀림없다.





3

권투가 국민 스포츠였던 시절이 있었다. 록키 시리즈는 그 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크리드1>과 <블랙 팬서>를 만든 라이언 쿠글러가 <크리드2>에는 기획만 참여하고 연출을 스티븐 케이플 주니어에게 넘겼다. 라이언 쿠글러는 어느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자신을 매혹했던 <록키>시리즈를 언젠가 다시 만들고 싶었다라고 했다. 많은 감독들이 필로그래피에 어느 시점 꼭꼭 숨겨뒀던 '자기만의 이야기'를 꺼내 그린다. 그래서 <크리드2>는 라이언 쿠글러가 아니어서 아쉬웠다. 아재들의 귀환, <크리드2>에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원작에 관여했고 돌프 룬드그렌까지 나온다. 아폴로 크리드의 아들과 이반 드라고의 아들의 대를 이은 대결,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4

<크리드1>(2015) 초반에 옛날 록키와 아폴로가 대결하는 장면을 커다란 프로젝트로 켜놓고 록키 스텝에 맞춰, 마이클 B. 조던이 경기를 따라 스텝 밟고 펀치를 날리는 장면이 나온다. 필라델피아 록키 발보아 동상 장면부터 실베스터 스탤론과 록키 시리즈에 헌사를 보내는 장면이 <크리드>엔 가득이다. 록키였던 실베스터 스텔론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권투를 가르쳐 달라며 자신의 스승 되어주길 바라는 장면은 원형적이다. 해아래 새 것이 없을테고 결국 '전형적'이어서 망하느냐 '원형적'이면서도 그 속에서 새로움을 길어내느냐가 한끗 차이일 수 있는데 라이언 쿠글러는 <크리드>에서 그걸 해낸다. 이야기는 기구하고 훈련 과정은 기막히다. 게다가 필라델피아 거리와 그럴듯한 멜로는 덤이다. 아도니스 존슨 역의 마이클 B. 조던이 트렁크를 입었을 땐 눈물을 왈칵 쏟을 뻔 했고 마지막 장면은 록키를 향한 진심어리고 존경 가득 담은 헌사였다. 딱 거기서 영화의 끝을 맺는게 맞다, 맞고 말고.





5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4)의 리드미컬하면서도 알싸한 정조가 좋았다. 새로운 감독의 등장과 그의 페르소나의 탄생, 라이언 쿠글러가 연출한 <블랙 팬서>는 마블 시리즈 중 단연 최고였다. <블랙 팬서>에서 마이클 B. 조던은 에릭 킬몽거로 등장해 채드윅 보즈먼이 연기한 티찰라의 대항마로 설득력 있는 분노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에서 깜짝 등장한 마이클 B. 조던이 반가웠다. 하지만 <크리드2>는 과욕이자 참사였다.  <크리드2>는 결국 사달이 났다. 유치했고 몸쓸 정도로 뻔했다. 원형적인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1편 보다 나은 2편 만들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소문에 마이클 B. 조던이 감독과 주연을 맡으며 <크리스3>편을 찍고 있단다. 솔직히 겁난다. 혹시나 싶지만 역시나일 가능성이 99.9%라고 장담한다. 제발 내 예상이 틀렸다고 두 손 싹싹 빌도록 보란듯이 잘 만들어주길 바란다. 제발.



덧)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를 보고 왔는데, 이상하게도 <크리드>를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어졌다.




영화 <록키> 배경은 필라델피아 흑인(Black) 빈민가다. 록키가 뛰었던 거리, 훈련했던 조 프레이저 체육관도 필라델피아 흑인 빈민가 근처에 있다. 록키 1편에는 실제 실베스터 스탤론이 이탈리아 이민자로 살아가며 느낀 삶의 체험이 녹아 있고 각본에도 참여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장면과 엔딩은 수없이 많을테다. 록키 1편 엔딩과 록키2•3•5편에 등장하는 이 계단은 록키 영화에서 주인공의 심경과 결심에 결정적인 변곡점으로 등장한다. 서사와 공간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영화적 요소라 필레델피아 미술관 이 계단은 유명 관광 명소가 되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그 자체로도 유명하다. 큐레이팅 잘 하기로 소문 났고 공간 규모도 크고 미술 소장품도 다양하다. 건물 역시 아름답다. 필라델피아 시내가 한 눈에 펼쳐지는 영화 <필라델피아>의 아름다운 오프닝 부감 숏 역시 미술관에서 바라보는 시점 숏이다.





록키 스텝(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계단)에는 국적 불문 계단을 달려 올라 팔 흔드는 아저씨들이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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