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의 가을은 너무 아름답다. 속도 없이...
"수치스럽게 살아 돌아온 이는 알 바 아니다"
당시 미군에 포로로 잡힌 조선인 20여 명에 대한 조선 조정의 입장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미군은 이들을 그냥 석방한다.
"적군은 참패의 와중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 중이다. 패배가 당연해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다. 아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임에도 불구하고 적군은 장군의 수자기(帥字旗) 아래, 일어서고 또 일어선다. 칼과 창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리며 저항한다. 이토록 처참하고, 무섭도록 구슬픈 전투는 처음이다."
미군의 전투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당시 조선군은 500여 명의 병력에 화승총이 전부였으나 미군은 군함만 5척에 비교조차 되지 않는 대포 등의 화력과 해군과 해병 등 병력 1230여 명에 레밍턴 소총 등 그야말로 최신의 무기로 무장된 상태로 상대 전력 비교 운운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다.
만추의 가을도 저물어가는 즈음에는 만물과 강상에 쓸쓸함이 깃드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다.
또 그 쓸쓸함을 사랑하기까지도 한다.
광성보의 가을은 너무나 아름답다. 속도 없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는 가냘픈 여린 가을의 서정성마저 고개를 들기 힘들 정도로 나를 옥죄어 옴을 느낀다.
"찬란한 조선의 500년 역사"는 어디에도 없고 민중의 서글픈 역사만이 지금껏 면면히 그리고 또렷하게 이어져 오기 때문이다.
1871년 6월 1일 광성진 앞바다에 미군을 향해 대포가 불을 뿜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광성보 용두돈대 풍경
하지만 대포라고 해야 나무로 만들어진 받침에 짚으로 묶은 무쇠 총통을 얹어놓은 것이 고작이어서 목표를 찾아 조준해 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놓은 목표물에 적이 와야 명중시킬 수 있는 조악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미양요"는 6월 11일 교전 종료까지 11일간 이어진다.
교전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에 부상자 12명이다.
응전한 조선군은 지휘관(어재연) 포함 전사자 243명, 익사자 100여 명, 포로 20여 명이다.
이런 수치는 서로 응전하는 전투에서는 나올 수 없는 수치다. 일방의 조준 전투사격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전투 후 미군이 찍은 사진
이 일방적 전투에 대한 미국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 지의 헤드라인은 "이교도와 우리의 작은 전쟁(Our little war with the heathen)"이었으며 경제적 이권을 위해 미군의 목숨을 소모한다는 아주 건조한 비판적 내용이었다.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미리견(彌利堅, 미국)을 물리쳤다며 전국에 대대적인 "척화비(斥和碑,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종로 네거리를 위시한 전국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세운 비석(碑石)"를 세워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척화비
얼마 전 TV N에서 방영한 "미스터 선샤인"에서 극 초반에 비교적 사실적인 전투 묘사가 그려진다.
하지만 불과 4년 뒤 이 사건을 흉내 낸 일본에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은 결국 문호를 개방하며 치욕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이 사건은 한 나라를 이끄는 위정자들의 머릿속에 어떤 철학이 깃들어 있느냐에 따라 힘없는 민초들의 운명이 속절없이 휘둘리는지를 보여주는 더없이 좋은 적절한 교보재다.
적이었던 미군이 보기에 처절할 정도로 싸워야만 했던 우리의 조상들은 그들의 위정자들이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이들은 알 바 아니다"라고 말할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그리도 처절하게 싸웠나 보다.
만추의 이 가을에 쓸쓸함과 울분이 더하는 이유다.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그 비극의 무대가 성벽 위에서 사무실 책상 위로 옮겨졌을 뿐이다.
우리가 이 처참한 기록에서 직시해야 할 실체는 '척화비'라는 거대한 기만이다.
척화비는 단순한 통상 수교 거부의 비석이 아니다. 그것은 소통을 거부한 차가운 돌덩이이자, 이름 없는 민초(우리)들의 이름 없는 묘비명이다.
오늘날의 리더들도 여전히 '척화비'를 세운다. 현장의 실무자들이 사거리조차 닿지 않는 도구를 들고 흙을 뿌리며 사투를 벌일 때, 리더들은 격차를 화려한 마케팅 문구와 비전으로 장식한다.
그 돌덩이의 무게는 고스란히 현장의 희생으로 지탱되지만, 정작 조직은 위기의 순간 "포로가 된 당신들은 알 바 아니다"라며 당신을 손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
차가운 척화비는 결코 민초의 피를 기억하지 않는다. 당신의 열정이 숭고할수록, 당신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 그래서, 당신만의 정밀한 라이플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