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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본 Apr 11. 2020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with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저녁에 / 김광섭 -




넓고 넓은 세상에서, 많고 많은 사람 중 한 명인 내가 또 한 명인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신비로운 일이다. 끈끈한 인연의 가족으로, 혹 배우자로, 부모자식으로 만날 수도 있고, 친구, 직장 동료, 스쳐지나간 인연까지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특별한 인연고리를 맺고있다. 그 인연은 수천, 수만이 넘는 경우의 수를 넘어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소중하고도 특별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 특별한 서로의 인연에도 이별이라는 슬픔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사랑하다가 헤어질 수도 있고, 사별할 수도 있고,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에서도 결국 죽음은 각자의 운명속에 있다. 과연 우리라는 공동체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이별이란 참으로 슬프고 가슴아픈 일이다. 어느 누구도 이별을 예감하고 만남을 시작하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생의 처음부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예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어쩐지 이 세상이 끝날 때 까지 함께 할 것 같은 기분, 결코 우리에게는 마지막은 없을 것 같은 느낌, 생의 마지막까지도 함께 하고픈 바람이 있다. 그러나 생리사별(生離死別)이라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떠나간 사람뒤에는 남겨진 사람이 있고, 죽은 사람 뒤에는 산 사람이 있다. 그들은 모두 이별 한 어느 누구를 그리워하고, 다시 만날 수 없음에 한탄하고 서글퍼하며 또 하루를 살아간다. 어쩌면 삶이란 끝없는 만남과 이별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 다시 만나랴 16-IV-70 #166, (1970),     면천에 유채, 개인소장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 다시 만나랴>는 이별의 서글픔과 헤어진 누군가와 다시 만나고픈 염원이 담긴 작품이다. 무수히 많은  푸른 점은 사각의 면으로 쌓여있다. 마치 개개인이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듯이. 무수히 많은 점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지구상의 사람같기도 하고, 넓고 깊은 하늘을 수 놓은 별들 같기도 하다. 제각각의 사각의 틀에 쌓인 점들은 다른 모양으로 천을 뒤 덮는다.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광할한 우주처럼, 빼곡히 화면을 뒤 덮고 있다. 각각의 점은 저마다의 모습을 하고 있고, 저마다 주인공처럼 빛이 나지만 화면 전체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단지 일부일 뿐이다. 마치 우리 자신이 전 세계, 전 우주의 일부 인 것 처럼.


그렇다고 점들이 저마다의 색을 잃고 있는냐. 그것은 아니다. 2차원의 화면은 동일한 선으로 쌓인 점의 연속으로 생동감있게 표현되어있다. 점 하나 하나는 중첩되고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 결국 화면의 전체를 채우고 있으며, 점을 메우고있는 사각면 또한 그 점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때문에 같은 패턴인듯 같지 않은 패턴으로 미묘한 운동감을 느낄 수 있고, 점의 크기와 색체의 농담, 번짐 등의 차이로 마치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하늘을 수 놓는 별들처럼 보인다. 하늘 아래 각기 다른 인간이면서 하늘 안에서 각기 다른 별들처럼 밝게 빛나는 점들! 하지만 결코 유한한 할 수 없어 언젠가 사라져야 하는 부분들! 전체에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부분적으로는 충분히 가치있고 소중한 우리의 삶이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음을 감사해야 하는 순간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 다시 만나랴>는 김환기가 평소 절친했던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당시 김환기는 뉴욕에서 작품활동을 했고, 조형요소의 기본인 점·선·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65년 이후에는 특히 점에 대해 탐구하고, 점화로의 전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 다시 만나랴>는 이러한 뉴욕시대의 작품을 대변한다. 마치 동양화의 발묵법처럼, 물감이 천 또는 캔버스에 스며드는 듯 무수히 찍힌 점들이 시에서 언급된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는 뉴욕의 화려하고 밝은 야경속에서 고향에 대한 작가의 향수와 그리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청색의 맑고 투명한 색은 고향에 대한 순수함같고, 그 안에서 밝게 빛나는 많은 사람들 -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들은 마치 하늘을 빼곡히 채운 별들처럼 넓은 우주를 채워간다. 당장은 만날 수 없는 인연이라도 같은 밤 하늘, 별을 공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평온이 될까? 그리고 언제나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겠지. 


물리적 거리두기가 지속되고 있는 지금, 타지 또는 타국에서 소중한 가족, 친지, 인연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가까워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이 커지고 있는 현재,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무한히 쏟아지는 점이 '별'이 되어 모두의 그리움을 담아내 듯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 날을 기약하며 별을 그려본다. 점을 새겨본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서시 中 / 윤동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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