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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즈 Mar 31. 2023

샤프와 국민교육헌장

"엄마 샤프 좀 사주세요, 고장 났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샤프를 처음 쓰기 시작한 아들의 볼멘소리.

졸업기념으로 이름을 각인한 라미(LAMY) 샤프를 사줬는데 1년 넘게 쓰더니 고장이 났나 보다.


"고장 났어? 근데 그런 건 네가 문방구 가서 사면 되잖아. 집에 제도 샤프도 있고"

나는 아들 말이라면 꿈벅 죽는 엄마가 아닌 '독립심'을 핑계로 한없이 게으르고 '웬만하면 네가 해라' 주의의 엄마기에 나 역시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나 어릴 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한 푼 두 푼 용돈 긁어모아 문방구로 설레며 달려갔건만.. 요즘 애들은 정말 귀한 걸 모른다.


"문방구 갈 시간 없어~! 은색 샤프 멋진 거 봐뒀는데 그걸로 사주세요"

게임할 땐 시간 많고 늘 시간이 없다는 중2병 사춘기 아들.

뭐 사 달랠 때만 존댓말 하는 중2병 사춘기 아들.

이거 완전 갑질 아냐? 하아.. 오늘도 참을 인자 3개를 마음으로 쓴다.

사춘기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오늘도 집 분위기 엉망된다. 내가 좀 참자라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고쳐본다. 

평소 용돈 허투루 쓰지 않고, 여자애들처럼 필통 가득 가지각색 필기구를 사지 않는 아들이기에 그냥 샤프라도 좋은 거 사주자 하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샤프가 고장 났겠나. 


콕 집어 말한 "은색 샤프" 검색하다 보니 나온 스태들러 샤프.

딱 아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이다. 

장바구니에 담고, 인기순 정렬 시 2위인 펜탈 샤프도 담았다.

진짜 인기순인지 MD들의 수작인지 알 수 없지만 후기가 괜찮아서 둘 다 담았다.

1개 사도 택배비를 내야 하니까 핑계 대며.. 잃어버릴 때를 대비하자는 핑계를 하나 더 추가하여 안 써도 될 돈을 더 쓴다. 


이런 좋은 엄마가 어딨냐~


사실 아들이 안 쓴다고 하면 내가 쓰려고 한다.

샤프 쓸 일도 없고 필기할 일도 없는 내가 웬 샤프 욕심이람? 하면서 은근히 갖고 싶다. 

예쁘고 다양한 필기구는 늘 다다익선이다. 

집에 배송되어 온 샤프 두 개를 받자마자 내가 먼저 꺼내본다.

아니 스태들러는 독일제인줄 알고 샀는데 왜 JAPAN이냐.. 

내가 쓸 것도 아니지만 종이를 꺼내 휘적거리며 필기감 테스트를 해본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악필 주의

다이어리가 생기거나, 메모지가 생기거나, 필기구가 생기면 제일 먼저 써보는 문장이 바로 "국민교육헌장"이다. 아, 저절로 연식이 나온다 싶어 나도 모르게 웃음을 피식 웃었다. 도대체 어느 시절 쓰던 국민교육헌장인데 이렇게도 세뇌가 되어 쓰고 있나 싶기도 하고.


우리 외삼촌 시대에는 학교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게 했다고 했다. 외삼촌이 국민학생 일 때 국민교육헌장을 하도 잘 외워서 천재 소리 들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한다. 나때만 해도, 첨부터 끝까지 외우게 하진 않았지만 첫 문단 정도는 저절로 외웠던 것 같다. 모든 교과서 맨 앞장에 있던 문장이니 이 얼마나 강력한 세뇌인가.


국민교육헌장 내용



아니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내가 잘 살려고 태어나는 거지 민족중흥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니??? 

이건 엄청난 국가의 폭력성 발언 아닌가?  

폭력이 난무하던 1968년 시대상을 반영하면 이해가 되지만 지금 생각으론 정말 MZ세대에게 조롱당하기 딱 좋은 문구들이다. 하지만 뒤에 문장들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 아니라 "나의 발전이 나라의 융성에 근본"으로만 바꾸면 괜찮은 것 같다. 뭐 하긴 그때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고심하여 머리를 맞대어 만든 문장이었을 테니 내가 평가하긴 그렇고. 강제로 외우게 했던 방식이 문제였겠다 싶다.


여하튼 스태들러 샤프는 무겁고 펜탈 샤프는 가볍다. ㅎㅎㅎ

샤프 얘기 하다가 국민교육헌장 얘기하는 이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 

아들에게 샤프 두 개를 건네주며 새 샤프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해본다. 국민교육헌장 읊던 시대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교육열과 교육 방법은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오히려 학생들은 더 힘들어졌고 부모의 돈과 관심이 더 필요해지고 사교육이 필수인 시대가 되어 더 불공정해버린 것 같다. 내 여고 시절, 서태지와 아이들이 "교실이데아"를 들고 나왔을 때 뭔가 세상이 바뀔 줄 알았는데, 전혀 바뀐 게 없이 30년이 그대로 흘러버렸다. 


PS. 여러분은 필기구 테스트할 때 어떤 문장을 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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