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주 쓰는 말이 몇 개 있다. '꼭꼭 씹어먹어라'도 그중에 하나다. 뭐가 이렇게 급하거나 뜸한 건지. 안 먹을 때는 그렇게 안 먹다가 먹기 시작하면 씹는 속도가 걱정될 정도로 빠르게 먹다 보니 '꼭꼭 씹어먹어'라는 잔소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한테만 해주던 말을 나에게 적용해야 할 상황이 왔다. 작년 건강검진 때 내시경 검사에 '만성 위염'이 쓰여 나왔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가슴 한편이 뜨끈뜨끈하다. 처음에는 삶의 열정이 지나쳐 그런 것이려니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만성 위염'이라는 아련한 글씨가 떠오른다. 심장이 빨리 뛰면 사랑이 아니라 부정맥을 먼저 의심하라는 T적인 문장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최근 몇 년간은 건강이 주제가 된다. 나를 돌보지 않는 삶에 더 이상 젊지 않은 몸은 삐꺽된다. 재 작년 정도부터 몸소 느끼다 보니 염려증에 가까울 만큼 조심하게 된다. 물론 마실 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마셔왔지만 슬슬 이것도 한계가 되는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올해는 유독 주변의 건강이 걱정된다. 세월이 야속하다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요즘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사람이 있을까? 단순히 남은 시간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위염치료는 꼭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큰 마음먹고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아주 익숙한 처방을 해주셨다. 교과서 적이지만 술, 매운 음식, 커피는 섭취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콜릿'도 먹지 말라고 한다. 요즘 술을 줄이면서 단것이 심하게 당기는 시기였는데 이것은 이것대로 곤란하다. 아무튼 모처럼 챙기는 건강인데 라는 생각에 어디선가 읽은 '먹는 속도'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천천히 먹어야 소화도 잘되고 위염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뭐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씹어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씹는 게 이렇게 어려웠다고? 일단 천천히라는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는 평소에 몇 번을 씹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거의 10번 씹고 넘기는 나를 발견한다. 이번에도 어디선가 본 30번 씹기를 도전해 본다. 어? 이거 의외로 어렵네. 게다가 30번을 세야 해서 핸드폰 따위는 볼 수 없다. 가만히 보니 밥 먹다가 갑자기 국물류를 섭취하면 거기서 씹기가 끊겨버린다. 거참 은근히 까다롭구먼.
이러다 보니 단순히 천천히 씹기가 아니라 식사에 집중하기가i 되어버린다. 핸드폰도 치우고 책도 치우고 오로지 몇 번을 씹는지 집중하다 보니 의외로 마음이 침착해진다. 최근 스트레스가 많아서 쉽게 침착하기 어려웠는데 어쩌면 명상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덧붙여 30번 정도 씹어서 먹으면 음식의 제맛이 느껴지는 요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모든 음식은 뒷맛이 있다는 것을 40여 년 만에 깨달았다. 와인 금단현상의 일종일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모든 음식에 끝맛이 존재한다는 것을 꼭꼭 씹기에서 배운다. 이러다 보니 한 끼 식사가 마치 하나의 의식이 돼버리는 느낌이다. 실제로 이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면 뭔가 한 바탕 정리된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식사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팅이 있다거나 뭘 봐야 한다거나 등등으로 대충 입에 뭘 넣는지도 모르게 시간을 지내다 보면 그것도 어쩌면 버튼이 꺼지지 않는 나의 연장선이다. 하루의 세끼라는 휴식을 인간 스스로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 무시하고 계속해서 버튼을 켜놓고 있으면 몸이 남아날까? 어쩌면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유독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힐링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유독 꼭꼭 씹어먹는 것이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이야기는 도처에 깔려있다.
'전교 1등이 되는 공부 비결이 뭡니까?' '교과서 위주로 기본에 충실했어요'
한숨이 나오지만 어쩌면 진심인지 모르겠다. 꼭꼭 씹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인간인데 복잡한 것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기본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스트레스 해소 포인트를 운 좋게 잡았다. 매일 3끼, 지독하게 꼭꼭 씹어버리고 복잡한 것은 서랍에 넣어둬야겠다. 영화 브루탈리스트에서 라즐로가 택한 방법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삶은 상황과 현상에 의해 유린당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신경 쓰게 되면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겠지. 상황에 어떤 피해를 보든 간에 위대한 건물을 짓는 사람은 그 결과물로서 영원에 다가가는 것처럼 일단 6시간마다 한 번씩 꼭꼭 씹어먹으면서 탑을 쌓아가야겠다.
(번외)
[헤르만 헤세 - 헤르만 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 中]
구원 (Errettung)
인간에게 존재하는 희망은, 세계와 다른 사람은 못 바꿔도 최소한 자기 자신만은 어느 정도 변화시키고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인 듯하다. 그리고 자신을 개선하는 사람 덕분에 세상은 은밀히 구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