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에게

by 시크매력젤리


시댁은 다른 사람 땅에 집을 짓고 팔십여 년 넘게 살았다. 일 년에 한 번씩 땅 값만 몇 십만 원씩 주인에게 보내줬었다. 그러다가 돈을 보내달라는 말이 없어서 그 마저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 땅 주인이 시댁에 찾아왔다. 둘째 아주버님과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시댁엔 단 몇 천만 원의 돈도 없다. 그 집에서 나간다면 갈 곳 없는 처지다. 아주버님의 전화를 받은 남편은 며칠을 머리 싸매며 고민했다. 그러더니 하는 말 9월에 적금만기가 되면 그 돈 이천만 원을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때 주겠다고 했다.


내게는 어떠한 상의도 동의도 얻지 않았다. 혼자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다. 그냥 그렇게 하겠다는 통보였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물론 아직은 그 어떤 결정도 나지 않았다.

나는 적금 만기가 되면 부푼 꿈을 안고 대출빚을 갚아야 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인생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시댁이 오랫동안 산 집을 비워야 되는 때가 현실이 되리란 걸 그 누가 알았겠는가. 산 넘어 산이다. 한 고비 넘기면 또 한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그 돈을 자신의 엄마에게 주겠다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 자신의 엄마가 길바닥에 나 앉게 생겼는데 배우자 따위는 아무 거리낌 없었을 것이다. 사정이 아무리 급하다 해도 이건 순서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십여 년 넘게 살 비비며 살아온 배우자에게 의논과 동의는 얻어야 되는 게 아닌가. 남편에게는 배우자를 존중하겠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서운함이 밀려온다.

나는 또 착한 부인 착한 며느리 착한 제수씨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


휴. 다행이다.

말할 곳 없었는데 대나무 숲이 되어주는 브런치 스토리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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