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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Nov 09. 2022

연말에 꼭 꺼내어 보는 영화 (1)

<이터널 선샤인> <로맨틱 홀리데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차디찬 공기가 성큼 다가오기 시작하면 내 마음은 이미 연말로 향한다. 겨울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해진 몇 편의 영화를 몇 번이고 보고, 롱패딩을 입은 채 얼굴만 내밀고 산책을 한다. 비스듬히 누워 종일 귤을 까먹으며 찜해두었던 드라마나 영화를 몰아보다가 대충 맨발에 운동화를 구겨 신고 나가 마라탕을 먹고 온다. 계절 자체보다 그 계절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그 분위기를 구석구석 사랑한다. 좋아하는 풍경을 완성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영화다. 코끝이 시릴 즈음 품 속에서 꺼낼 나의 사랑스러운 작품들을 소개한다. 당시 왓챠 한줄평으로 남긴 것까지 -수정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덧붙이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참고하시길.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사랑했던 기억을 안고 산다는 것은, 마음속 무덤 위에 무덤을 쌓는 일이다.

볼 때마다 오열하는 지점이 당겨진다. 처음 봤을 땐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몰라 헤맸다. 그러다 보고 또 보았고 운 좋게 재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보았을 땐 큰 화면 앞에서 울 수 있었다. 그리고 조엘만 따라가던 시선은 클레멘타인과 메리에게까지 가닿았다. 기억을 지워도 다시 그 사람에게 향하던 걸음은 기어코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멈춘다. 아픈 기억은 빨리 잊고 싶지만 그 경험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인해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서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혹 같은 선택을 해서 똑같은 결과를 마주하더라도 후회하면서 다른 감상을 덧붙여 나아가겠지. 


가장 춥고 어두운 밤에 본다. 기분이 가라앉는 날보다는 사람에게 종일 둘러싸여 있다가 돌아온 직후에. 뭔가 곁들여 마시는 것보다는 그냥 보는 게 훨씬 좋다. 보고 나서 창문을 열었을 때 쌓인 눈이 있다면 벅차오를 것 같다. 


가장 많이 본 장면: 차 안에서 오열하는 조엘

가장 적게 본 장면: 미국식 중국집에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식사하는 조엘과 클레멘타인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이터널 선샤인 OST 듣기


로맨틱 홀리데이(The Holiday)

운 좋게도 연휴 동안 마침내 눈물 흘리고 두 손 높여 만세한 두 여자를 위하여!

한줄평을 찾아보러 접속했는데 빈칸으로 남아있다. 심지어 별점도 3점. 그런데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이 영화를 보고, 또 친구들에게까지 추천하며 같이 본 이유가 있다. 먼저, 영화 보는 내내 두통을 유발하는 캐릭터가 별로 없다. 자극적인 콘텐츠에 이미 단련되어 결혼하고도 주둥이로만 플러팅 날리는 찝쩍남 -심지어 안전제일주의자라 여주에게 그 어떤 스킨십도 시도하지 않음- 이나 바쁜 스케줄을 핑계로 바람피우는 애인 -바람피우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쾌적함- 정도는 배경처럼 취급할 수 있다. 또, 상반된 매력을 가진 서로의 집을 아무 걱정 없이 교환해 연휴 동안 사는 두 주인공을 보면서 나 또한 이들을 편안하게 구경만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두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을 겪지 않고 무려 연휴 안에 각자 깨달음을 얻는 모습을 두 발 뻗고 볼 수 있는 점이 자꾸만 이 영화를 찾게 만든다. 


밝고 시끌벅적하게 봐야 더 재밌다. 기름진 음식을 곁들여 뱃속을 채워갈수록 디즈니랜드처럼 느껴지는 영화 속 배경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다 보고 나면 구구절절 떠들고 다녔던 지난 인연들에 대해 말하거나 괜히 에어비앤비를 뒤적이며 여행을 계획할 수도 있다.


+ 아! 배우 주드 로의 로맨스 연기가 담긴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후 개봉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이후 그는 극 중에서 바쁘게 뛰어다니기만 한다.)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 집 구경하기

마일스(잭 블랙) 장기자랑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

운명으로 포장했지만 사실 내적 쎄함을 믿고 나아간 한 걸음

가족에게 약혼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 속 돌싱남의 사연을 듣게 된 애니(멕 라이언). 어쩐지 애니는 곁에 있는 약혼남 대신 목소리만 알게 된 샘(톰 행크스)을 자꾸만 떠올린다. 상상 정도만 했으면 괜찮았겠지만 그가 사는 시애틀까지 가 샘과 그의 아들 조나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 다행히(?) 낯선 여성이 함께 있는 걸 보고 돌아서고 만다. 이들이 결국 만나 가까운 미래를 그려나가게 될 때까지, 그 어떤 요소도 도대체 이해할 수 있는 점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만 되면 이 작품을 찾는다. 라디오, 편지, 통화 같은 요소 때문이다.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만 듣고 그 라디오를 들은 여성들이 샘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 봉투를 하나하나 뜯어가며 보내온 이들의 거침없는 고백을 읽는 장면이나 긴 선이 달린 전화기를 들고 오가는 장면 등 내가 겪었거나 겪지 않은 것들에 향수를 느낀다. 지금보다 불편하고 느리지만 그렇기에 더욱 애틋한 무게가 느껴지는 소재를 찾으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각종 포근한 잠옷, 이불, 수면양말 등을 구비해 장착한 채 보면 좋다. 물론, 영화를 보다 답답해서 수면양말 같은 건 어느 새 벗어버리겠지만. 혼자 혹은 둘이 보는 것도 추천하는데, 그건 극 중 애니가 친구와 함께 울고불고하며 영화를 보는 장면이 인상깊었기 때문이다. 편안한 관계 혹은 새로운 관계에 대한 논쟁이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애니와 샘이 만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입장권 확인하기

(국내개봉일 기준) 5년 후 만난 애니와 샘의 이야기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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