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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May 21. 2020

막걸리 한 잔

그래, 머리보다 막걸리 터지는 게 낫지

최근 막걸리 만들기 클래스를 다녀왔다. 마시다 마시다 만들러까지 갔냐는 뜨거운 반응을 뒤로한 채 가고야 말았다. 기대한 것보다 더 좋아서 다음에는 비가 올 때 가보고 싶다. 친구들과 그날의 여운을 한껏 나눈 다음 그곳에서 먹은 막걸리가 마음에 쏙 든 나머지 당일 저녁 온라인스토어에서 세 병을 샀다. 두 병은 가족끼리 먹고, 한 병은 동네 친구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과 막걸리를 맛보는 날, 터지고야 말았다. 이 막걸리는 기존 막걸리와 다르게 간격을 두고 탄산을 조심스럽게 빼줘야 한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과정을 일절 생략하고 나의 말을 무시한 채 막걸리를 열었다. 막걸리는 펑! 터져서 주방을 뒤덮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서 그랬을까? 꿈만 같았다. (클래스를 듣는 당시, 선생님이 보통 다른 막걸리랑 똑같이 열다가 6,000원어치 날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는데 그게 내 앞에서 일어날 일인 줄 몰라서 크게 웃었다)


막걸리 향기(!)가 코끝을 건드리자 꿈이 아니구나 싶어 웃음이 터졌고 아빠는 머쓱해하며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갔다. 

 

엄마는 "XX(구수한 욕)! 고집부리다 탈 났네, 그게 막걸리가 터지는 걸로 끝나 다행이여." 라고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가의 마음이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니까 그나마 이렇게 웃기라도 한다면서 걸레를 꺼내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온 아빠를 포함한 셋은 열심히 주방 곳곳의 막걸리를 닦아내고 반밖에 남지 않은 막걸리를 금세 비운 후 새 병을 꺼냈다. 


아빠는 그 난리를 겪고도 다시 한번 막걸리를 손에 쥐었다. 제대로 설명해보라는 듯 나를 쳐다보길래 천천히, 최대한 간결하게 말했다. 비장한 모습으로 싱크대 앞으로 가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제야, 뚜껑을 돌려 탄산이 빠질 때 자동으로 섞이는 풍경을 보았다. 신기해하는 눈으로 둘은 서로를 보았다. 그런 눈 네 개를 앞에서 보고 있자니 내 나이 60이 되어도 아빠처럼 작고 새로운 것에 계속 (야유를 들었음에도) 도전하고, 엄마처럼 신기해하는 눈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새로운 막걸리 두 병으로 그날 저녁은 시끌벅적했다. 엄마는 막걸리 맛이 좋다며 연거푸 석 잔을 마셨고 아빠는 본인 입맛에 맞지 않지만, 첫 잔과 마지막 잔을 비우며 익숙한 언행 불일치 애주가의 모습을 보였다. 막걸리 덕분에 얼큰해진 분위기로 딱새우를 시켰고 오늘 배송 예정이라 설렌다.


내가 경험한 걸 나눠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상대가 다름 아닌 가족이라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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