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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Feb 16. 2020

나는 내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그리고픈 나만의 장면

쌓여있던 박스를 뜯고 접어서 밖에 내놨다. 일반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 더 이상 입지 않는 딱 붙는 상의까지 버렸다. 침대 머리맡에 있던 다 읽은 책들도 상태를 점검한 후 온라인 중고책 사이트에 판매했다. 속이 좀 시원했다. 어제까지는 걸어 다닐 때마다 걸리적거리던 노트북 선이 오늘은 거슬리지 않았다. 이제 좀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르는 카페마다 만석이다. 산책 겸 옆 동네까지 나왔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인터넷에서는 온종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코로나 확진자’, ‘0번째 확진자’ 실검이 오르내려서 나름(?) 한적할 줄 알았다. 다들 멀리 가지 않고 카페에만 머무는 걸까. 오늘따라 평소에 들고 다니지 않았던 수첩과 책도 있어서 유독 어깨가 무겁다.


결국, 우리 동네로 다시 돌아왔다. 얼마 전에 주문한 원두를 분쇄할 겸 스타벅스에 간거 였는데 자리가 없다고 분쇄도 안하고 나왔다. (ㅋㅋㅋ) 항상 앉던 자리를 생각하며 단골 카페에 들어섰는데 사람들이 꽉 들어 차있다. 창가 자리에 겨우 자리잡고 있다가 나중에 자리를 옮겼다. 채용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앞으로의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상상의 시작은 20평 남짓한 아파트. 상상은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그런 아파트에 살려면 복권에 두 번 당첨 되어도 불가능하니까. 


지쳤다. 전에는 꼭 서울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니, 서울이어야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가고 싶은 공간은 모두 이 곳에만 있었다. 그래서 집이라고 불리는 한 칸짜리 공간도, 숨막히는 출퇴근 길도 당연하게 견뎠다. 지금은 넘쳐서 탈이다. 사람이 넘쳐서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는 것도 아주 힘들어졌고, 괜찮은 공간은 자리가 없다. 어디든 사람 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은 한숨을 길게 쉬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올라가기 위해 묵인했던 모든 상황을 내려가기 위해 되짚어보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건 마음껏 어지럽힐 수 있는 책상, 책을 읽거나 편안하게 누워 뒤척일 수 있는 침대, 요가매트를 깔고 누워 잠시나마 허접하게 몸부림 칠 수 있는 공간, 좋아하는 영화의 포스터를 붙일 수 있는 벽과 옷 매무새를 가다듬을 수 있는 자리다. 침대 위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세탁기 옆에 분리수거를 앞둔 상자와 플라스틱 꾸러미가 있는 풍경을 허용하고 싶지 않다.



그날의 콘텐츠

- 넷플릭스 <카모메 식당>

- 넷플릭스 [나 홀로 그대]



이 글은 대부분 사실에 기반하나, 특정 인물 및 상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 상상력을 동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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