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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May 20. 2022

야금야금 꺼내 먹어요

쓰고 나면 에피소드 | 내 모든 이야기는 글감이 된다 


유튜브를 보다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가끔 몰아서 챙겨보는 유튜버 해쭈에게는 가족이 많다. 그중 조카와의 에피소드가 종종 올라오는데, 조카는 매번 자신만만하게 고모인 해쭈 옆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다가 얼마 전 올라온 영상에서 해쭈가 조카에게 묻는다. 


오늘 왜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했어?


왜냐면 쭈쭈(해쭈)가 날 좋아하잖아


몇 년 전 여름, 친구와 친구 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었다. 지금과 달리 방에는 싱글 침대가 놓여있었다. 아이는 내 옆에서 자겠다며 친구와 한창 실랑이를 벌였다. 일주일도 아니고 단 하루인데, 같이 자는 게 무슨 문제인가 싶어 옆에 눕혔아. 아이와 나란히 누웠다가 서로 눈 마주치면 낄낄거리며 웃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시답잖은 말을 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열 많은 아이가 계속 뒤척여 시원한 자리로 옮겨주었다. 


아이가 마침내 침대에 올라왔을 때 친구가 아이에게 물었다. 


짹짹아, 이모 피곤할 텐데 왜 이모 옆에서 잔다고 하는 거야?


이모가 날 좋아하잖아~ 


친구는 웃음이 터져 더 이상 말리지 않았고, 귀여운 투닥거림을 보고 있던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태어난 직후부터 본 쪼그맹이가 이렇게 당당하게 내 마음을 확신하다니. 동시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아무 이유 없이 푹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런 환경을 조성해 준(?) 친구가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게는 조카가 있다. 친척동생의 아이인데, 모두의 손주이자 조카로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만나게 되었다. 3살 남짓 되었을 때인가? 온몸을 다 바쳐 놀아준 이후 조카는 나만 보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저 멀리서부터 "고모!!!!"하고 소리 지르며 뛰어오는 걸 보고 있으면 행복이 차올라 어쩔 줄 모르겠다.


어떤 날에는 이모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한참 놀다 잘 시간이 되었는데 조카의 눈은 반짝거린다. 잠을 자기 싫어 자꾸만 쫑알거리는 조카에게 잠이 안 오냐 물었다. 그러자 조카는 뜻밖의 말을 했다. 


고모가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와! 고모도 그렇지? 


이미 답이 정해진 물음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조카였다. 늑대와 아기 염소, 잠 요정 이야기를 수십 번 속삭이고 나서야 잠들 수 있었다. 이후에도 조카는 종종 확신에 찬 나의 마음을 소리 내어 말했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을 때, 같이 손 잡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지친 몸을 내 등에 맡겼을 때, 나한테 혼나서 울고 난 직후까지. 


주변에 나를 믿고 함께 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가끔 외로움이 이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꺼낼 수 있는 장면 중 가장 큰 힘을 가진 게 이런 기억들이다. 얼마 전, 조카와 영상통화를 하는데 얼굴이 보이자마자 보고 싶다고 하는 말에 당장 한국에 가고 싶었다. 호르몬의 난동에 요 며칠 마음이 동당거렸는데, 나는 또 이렇게 힘 있는 기억을 야금야금 꺼내먹으며 환기시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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