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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키 Sep 17. 2024

친구가 있다는 건..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난다는 건 마치 봉인된 기억을 풀어놓는 일과 같다. 나에 대해 내가 모르는 혹은 내가 잊었던 것들을 기억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아끼던 인형을 잃어버리고 잃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내다 무심코 발견했을 때의 느낌 같달까.


얼마 전 코로나 이후 4년 만에 초등학교 친구들 모임에 갔었다. 소년소녀였을 때의 모습 그대로 한날 한 공간에서 마주 한다는 건 기적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는 걸 내 나이쯤 되면 누구나 알게 된다. 그러니 그저 반갑고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누가 들으면 웃겠지만 내 보기에 친구들은 진짜 하나도 변한 게 없는듯했다. 그 시절 새초롬하던 친구는 여전히 새초롬하고, 그 시절 울음 한번 울고 나면 그뿐 그대로 털고 일어났던 친구는 여전히 그래 보였다.


그때 그랬지.. 이야기를 나눌 때 한 친구는 내가 공책에 글씨를 쓸 때 뭉뚝한 연필로 두껍게 글씨를 쓰곤 했다고 말했다. 문득 친구의 기억 속 친구가 정말 나였을까.. 얼핏 의심이 들었지만 이내 수긍해 버렸다. 나는 뾰족한 연필심의 궤적을 좋아했지만 한동안은 힘조절에 실패해 곧잘 연필심을 부러뜨리곤 했으니까..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친구의 필통 속을 보면서 나는 좌절하곤 했었다. 친구의 자석필통 속 칸칸이 꽂힌  가지런하고 단정한 모습의 연필들은 왜 그리 나를 슬프게 했는지..

  

내 연필들은 정말이지 어린 내 눈에도  볼품이 없었다. 내가 깎은 연필은 두세 면이 뭉텅 깎여나가 마치 도끼로 팬 듯 보였고 연필심은 한쪽에서 보면 짧고 다른 쪽에서 보면 길었으니 친구의 그것처럼 고르게 여섯 면을 가진 연필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내 연필들은 대체로 짜리 몽땅해서 하얀 볼펜 깍지에 불안스레 끼워져 있었고, 내가 걷기라도 할라치면 플라스틱 필통 속에서 딸그락딸그락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장난을 치곤 했었다. 내 마음도 모르면서..


3학년 때였던가..  나는 교실에 남아 다음날 자습할 내용을칠판에 적고 있었다. 이때 '사회'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는데 그저 논으로 둘러싸인 촌에 사는 아이에게 '회사'는 그렇다 쳐도 '사회'라는 말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희한한 말이었다. 그보다 작은 학년일 때는 '백지장'과 '덖다'와같은 어휘들과 맞닥뜨렸을 때 나는 혼자서 입이 바짝바짝 마르곤 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 번도 선생님은 물론 엄마나 아버지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었다.


참 재미있다. 그동안 어디에 이런 기억들이 꼭꼭 숨어 있다가 이렇게 또렷이 되살아나는지.. 아마도 친구들을 만나지않았다면 영영 기억해내지 못했을 기억들이다.


예쁘고 반듯하게 연필을 깎아주고, 사소하지만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있는 어른이 부재했던 시절, 열 살 무렵 아이에게 어른들은 그냥 막연한 벽-어쩌면 나 스스로 만든-이었던 것 같다.


한때 어린아이였던 우리들.. 어느새 건강과 안녕이 최고의화두인 나이가 되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지금의 나이가 되기까지 겨우 스무날 정도 흘렀을까 싶은 건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후딱 지나가버리면 그만일 시간, 그렇기 때문에 누구는 내게 무조건 즐겁게 행복하게 살라 조언하지만 어이없게도 어떻게 사는 게 즐겁고 행복한 삶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를 온전히 '나'로 보아주고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 기뻐할 친구가 있다는 것, 그것만큼은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닐까 싶다. (2022. 12월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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