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잠이 가득 온 눈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잠자기 전 양치질은 왜 이리 귀찮은 건지. 조금만 조금만 하다 보면 늘 이 시간이다. 미리 해 놓았다면 졸릴 때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단잠을 잘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 마지막까지 양치질을 미루다 졸음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할 때쯤 어쩔 수 없이 양치질을 하러 간다. 분명 자기 위해 화장실을 간 건데 이상하게 화장실을 나올 때는 잠이 깨어 있다. 오늘도 숙면을 취하긴 그른 걸까.
화장실에서 내 잠을 빼앗아 가는 것은 거울에 비쳐 반짝이는 흰머리카락이다. 반쯤 감긴 눈에도 검은 머릿속 흰머리카락은 왜 이렇게 잘 보이는지. 한 개로 시작한 흰머리카락의 반짝임은 손이 닿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많아져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이제 양치는 뒷전이다.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흰머리카락 색출에 나선다. 가자미 눈이 되어 보이는 곳의 흰머리카락은 다 뽑아낼 기세로 족집게를 들고 덤벼보지만 늘 그렇듯 흰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이 뽑힌다. 한 올이 소중한 나인데.. 대학교 졸업 사진 촬영 날이 생각난다. 전날 예쁜 머리를 위해 평소 가지 않던 조금 비싼 미용실을 예약해 뒀었다. 분명 전날 예약할 때는 아무 말 없던 원장님은 고데를 위해 내 머리를 만져 보시고는 그제사 한숨을 쉬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직원을 나오게 할걸.”
늘 듣는 말인데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상하는 말이다. 머리숱 많은게 죄는 아닌데. 그래서일까. 나는 내 머리숱을 타박하지 않는 동네 작은 미용실 단골이다. 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것들을, 세월은 조용히 바꿔 놓는다. 여전히 많다고는 하지만 이제 내 머리숱은 미용사가 보고 기겁할 정도는 아니다. 매일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조만간 탈모를 걱정해야 할 지도..
화장실을 차지하고 나오지 않자 문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딸이 빼꼼히 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민다.
“엄마 뭐해?”
“엄마 흰머리가 너무 많아. 여기, 여기 봐봐.”
딸은 슬쩍 곁눈질로 내 머리를 보더니 영혼없는 대답을 한다.
“별로 없는데..”
“들추면 많아.”
“염색해.”
“염색 시작하면 흰머리가 더 난대.”
왠지 염색은 최대한 미루고 싶은 맘에 카더라 통신으로 핑계를 댔다.
“내가 뽑아 줄게.”
“언제? 수능 끝나고?”
“음.. 기말고사 끝나고?”
말이라도 고맙다고 인사 먼저 선불로 치렀지만 딸이 내 흰머리를 뽑는 날은 아마 없을 것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흰머리를 뽑아 달라 부탁하지 않는다. 흰머리를 뽑아달라는 부탁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내 어릴 적 엄마는 종종 흰머리를 뽑아 달라 부탁을 했었다.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귀찮았던지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미루거나 어쩌다 한 번 하더라도 설렁설렁 몇 개 뽑고 없다고 그만두었었다. 그러자 엄마는 특단의 조치로 흰머리 한 개당 용돈을 거셨다. 용돈을 따로 받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 개에 100원. 돈의 위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엄청나 한동안 엄마의 흰머리를 참 열심히도 뽑았었다. 그러다 흰머리 한 개의 단가가 50원으로, 10원으로 낮아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더 이상 내게 흰머리를 뽑아달라 하지 않으셨다. 노동(?) 강도는 세지고 수입은 줄던 터라 나 역시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알바는 끝이 났다.
밤마다 화장실 거울 앞에 붙어 흰머리와 전쟁을 하고 있는 요즘, 내게 용돈을 주며 흰머리를 뽑아 달라던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도 화장실 거울 앞에서 가자미 눈으로 흰머리와 전쟁을 하다 나를 부른 것일까? 요리조리 도망치는 이에게 부탁하는 마음이 서글펐을까? 더 이상 흰머리를 뽑는 대신 염색을 택한 마음은 어땠을까?
요즘 나는 가끔 무료로 남편의 흰머리를 뽑는다. 여전히 흰머리를 뽑는 것은 귀찮지만 뽑을 수 있는 흰머리는 그나마 행복한 일이란 걸 알기에.. 문득 귓가에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저 지지배 엄마 흰머리 뽑으랄 때는 지랄하더니 지 남편 흰머리는 잘도 뽑아주네.”
sorry!! m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