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미와의 어느 하루

by 꾸미


어제 예비 고3 딸이 수강하는 국어 인강 강사분이 구속되며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수학을 잘하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 이과적 사고를 하는 탓에 딸은 국어를 차~~암 못한다. 게다가 어휘력은 얼마나 창조적인지 여태껏 대학수학능력시험 [大學修學能力試驗]의 ‘수학’을 수학 [mathematics, 數學]인 줄 알고 있지 뭔가. 수학이 주요 과목이라 그렇게 부르나 보다 했다나.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딸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네이버 지식인에 떡 하니 같은 질문이 올라와 있다.)

그런 딸에게 한줄기 빛 같은 국어 수업을 해주신 분이 이번에 댓글 조작으로 구속된 박광일쌤이다. 작년 가을 처음 인강 수업을 들은 후 국어 공부가 재미있어졌다며 참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인강을 선택할 때 1타 강사라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나와 맞는 선생님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다행히 박광일쌤의 수업이 딸과 잘 맞아 국어 성적도 조금 오른 상태였다.

그런데 “그래. 결심했어. 국어는 박광일쌤 커리를 탈 거야.”라며 대성 프리패스와 박광일쌤 교재 패스까지 끊고 의욕을 불태우던 차에 이번 일이 터졌다. 강좌는 모두 홈페이지에서 내려갔고 교재는 환불 절차에 들어갔다.



나름대로 1년 국어 공부 계획을 세워놓았던 딸은 멘붕이 와 다른 국어 인강을 찾느라 사이트 유랑을 떠났다. 나름 이름이 있는 국어 인강쌤의 수업을 하나씩 들어보는 데만도 하루의 시간을 허비했지만 이미 박광일쌤 수업에 깊은 신뢰를 가진 딸의 마음에 드는 인강 수업을 찾기는 힘들었다. 나를 닮아 걱정 근심이 많은 데다 예민함의 최고조인 사춘기 여자 고사미인 딸은 결국 맛보기 인강을 듣다 지쳐 속상함에 푸념을 시작했다.



“왜 하필 지금이야. 올해까지만 하지. 검찰은 그렇게 할 일이 없대? N번방이나 똑바로 수사하지 말야.”

“아니 이게 2019년 사건인데 왜 이제와 구속이래. 금방 나와서 다시 수업을 하긴 어렵겠지?”

“이럴 거면 왜 강좌를 오픈했냐고?”

“아냐. 교재랑 수업이 완전히 바뀐 걸 보면 알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 구속될 사람이 이렇게 열심히 했을 리가 없어. 전체 환불하려면 얼마나 손핸데..”

“근데 진짜 그랬을까? 왜? 이미 자타공인 1탄데?”

“구속은 피해자가 신고해야 한다는데 누가 신고한 거야??”


그러다 결국..


“내가 좋아하면 다 망하나 봐.”


아이고..


“그건 또 뭔 소리야?”

“애아빠가 돼서 망하지 않나. 바람둥이가 돼서 망하지 않나. 하다 하다 내가 듣던 인강쌤이 구속까지 되다니. 역시 난 안되나 봐.”

‘아니 이게 그렇게까지 비하할 일인가?? 암튼..’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미 몸에 사리가 수십 개는 만들어질 정도로 딸에 대해선 득도한 나는 드라마 속 자상한 엄마 모드로 말했다.


“너 엑소랑 백현이를 좋아하는 거지 첸이랑 찬열이를 좋아한 건 아니잖아.”

“아냐. 첸은 아니지만 찬열인 좀 좋아질라고 했어.”

“어쨌든 니가 좋아한 건 아니잖아. 근데 뭘 또 그렇게까지 오버야?”

“그런가? 암튼 내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왜 하필 지금이냐고.”

“그래도 넌 작년에 커리 좀 탔잖아. 마닳이랑 비슷했다며. 일단 그걸로 혼자 공부하면서 천천히 다른 강좌 찾아봐. 분명 맞는 쌤이 있을 거야. 지금 급하게 찾으려니까 눈에 안 들어올 뿐이지.”


아이를 달래다 문득 내 10대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나도 그랬었다. 내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세상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었다. 나를 옭아매는 부모님의 기대와 잔소리에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어른만 되면 내 맘대로 하고 살거라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반세기 가까이 살아보니 나이가 들수록 내 맘대로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아진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렇고 돈 버는 일이 그렇고 효도하는 일이 그렇고 아름답게 늙는 일이 그렇고 사랑하며 사는 일이 그렇다. 사는 게 다 그렇더라.



“딸. 지금 니 맘대로 되는 일이 없어 보이지? 엄마도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이 가장 니 맘대로 하고 사는 거야. 나이 들면 내 맘대로 되는 일이 더 없어진다. 엄마 봐봐. 화장실 가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잖아.”

“ㅋㅋㅋ”


내일은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조금 더 많아지길 바라며, 그렇게 우리의 하루가 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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