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도 더 지난 일이 생각난 것은 읽던 책 때문이었다.
친정에 무언가를 사 가지고 간 적이 없기에 시댁에도 당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철부지 새댁은 시댁에 갈 때도 달랑 몸만 갔다. 용돈도 드리고 제사 비용도 드리고 제사 음식도 함께 하니 그래도 되는 줄 알았고 주변에 정보를 교환할 결혼한 친구도 없었다. 남편에게 물어보면 “집에 가는데 뭘 들고 가.”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받기도 했고.(동갑내기 부부입니다. ^^) 하지만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이건 어디까지나 눈치라고는 약에 쓸라고 해도 없는 며느리 생각이었다. 시어머니의 마음은 다르다는 걸 나중에 형님을 통해 듣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시댁에 올 때는 양손이 무겁게 오기를 바라신다는 걸.. ^^
그 후 내 고민은 시어머니 맘에도 들며 동시에 우리 집 가계형편에도 맞는 선물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시어머니가 원하시는 걸 사드릴 수 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모두 만족스러웠겠지만 우리 집 경제 사정과 시어머니가 원하시는 선물 사이의 갭은 너무 커 차마 무엇이 갖고 싶으시냐 여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어머니께 식품 건조기를 선물했던 설의 상황은 이러했다. 이전부터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를 볼 때마다 오쿠와 식품 건조기 이야기를 하셨다. 오쿠가 있으면 이것도 가능하다더라, 저것도 가능하다더라, 식품 건조기만 있으면 과일도 말려 먹고 무말랭이도 할 수 있고 식재료 보관이 편하다더라 등등. 각종 광고와 누군가에게 들은 오쿠와 식품 건조기의 장점을 계속 이야기하셨다. ‘아, 그게 갖고 싶으신 건가?’싶은 생각에 형님이 “사 드려요?”라고 물으시면 시어머니는 “아니다. 내가 그게 뭐가 필요하겠냐. 그런 것도 식구가 많아야 쓸모가 있지.”라며 거절하셨다. 아마...도?
시어머니는 평소에는 직설적인 화법을 주로 사용하시는데 이런 일에 대해서는 꼭 거시가 화법을 택하시는 탓에 우리는 시어머니의 의중을 눈치 빠르게 캐치해내야 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광고 속 문구일 뿐 실제로는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해도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몇 번의 ‘거시기 화법’으로 좋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거절이 거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형님이 내게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이번 명절 선물로 내가 오쿠 해드릴 테니까 네가 식품 건조기 해.”
그렇게 그 해 설 식품 건조기를 들고 시댁에 갔다. 효용성이야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선물을 받으시는 시어머니의 반응은 의외였다.
“식구도 없는데 이제 내가 이런 살림살이가 뭐 필요하냐.”
잉? 이것도 거시기 화법인가? 사달라는 말씀이 아니셨던 건가?
신기해하는 식구들의 반응과는 달리 시어머니의 반응은 너무도 시큰둥했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바나나를 사다 잘라 넣는 것도 마지못해 하셨다.
너무 늦게 사드렸나?
그 후 딱 한 번 더 고구마 말랭이를 하신 이후 시어머니는 식품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고 처박아 두고 계신다. 오쿠 역시 마찬가지다. 식품 건조기보다 비싼 살림도구라 식품 건조기보다는 한두 번 더 사용하시는 듯했지만 결론적으로 치면 둘 다 안 쓰는 방에 박스채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시어머니의 거시기 화법을 이해하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윗사람인 시어머니의 거시기 화법은 의도하셨건 의도치 않았건 아랫사람인 우리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부분일 뿐만 아니라 짜증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무리한 요구를 직설화법으로 하시는 것도 힘들지만 내 마음을 맞춰 봐 식 거시기 화법 역시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거시기 화법이 시어머니만의 문제는 아니란 걸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오십이 되었다>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책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권력이 클수록, 돈이 많을수록 자신의 ‘의도’만 중요하지 그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전달되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위, 권력에 ‘나이’까지 많은 대부분의 이들이 ‘거시기 화법’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거시기 화법’은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는 정신적 노화인 것이다.
내게 했던 시어머니의 모진 말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어머니의 그동안의 행동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시어머니는 더 모질고 더 나쁜 분이 아니라 그저 노화에 따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셨던 것뿐이란 걸. 우리는 신체적 노화를 늦추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지만 정신적 노화를 늦추기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 역시 모르고 지나쳤겠지. 모르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가끔은 모르고 해도 죄가 된다) 알고도 하는 것은 죄가 된다. 잊지 말자. 나이가 들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권력이 클수록, 돈이 많을수록(이건 해당사항이 없을 것 같다. ㅠㅠ) 내 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먼저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