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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May 19. 2021

남편이 이벤트에 당첨되면 생기는 일


생애 처음 피부과 시술을 받던 날. 하필 비싼 택배가 일찌감치 집 앞에 도착을 했다.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만 혹시나 택배가 분실될까 하는 걱정에 진료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대부분의 사건 사고는 ‘혹시나’, ‘설마’, ‘만일’ 같은 경우에 일어나기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까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 남편이 보내준 도착 택배 사진은 2개였는데 그 위에 커다란 상자가 한 개 더 올라가 있었다. 택배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잠시 의문의 상자를 요리조리 살펴봤다. 오늘 올 택배가 총 3개이긴 했는데 선크림 두 개가 들어있기에는 너무 큰 택배 상자였다. 요리보고 조리보고, 집에 들어올 생각도 안 하고 문밖에서 택배 상자를 살펴보다 상자 옆에 적힌 글자를 발견했다.


화병


허허허. 꽃이구나.


결혼 후 몇 번인가 남편은 꽃을 선물했었다. 한 번은 결혼기념일 깜짝 이벤트로 꽃바구니를 배달시켰었는데 혹시나 집에 사람이 없을까 봐 업체에서 내게 전화를 하는 바람에 들통이 난 적도 있었다. 누가 보내는 거냐고 묻는 내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던 업체 직원 이야기를 하며 남편이랑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알 것 같은데.. ㅋㅋ 그 후론 가끔 회사 앞 떨이로 파는 작은 꽃다발을 뜬금없이 사들고 오기도 했었는데 점점 더 횟수가 줄더니 최근 몇 년간은 꽃 선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화병>이라는 글씨가 적힌 박스를 보니 몇 년 전 남편이 마지막으로 꽃 선물을 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지금처럼 생화와 꽃병이 택배로 배달되어 왔었다. 무슨 꽃이었는지 무슨 이유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닥 예쁘지 않았던 것은 확실히 생각난다. 함께 배달되어 온 화병이 너무 커서 당최 꽃을 예쁘게 꽃을 수가 없었다. 꽃만큼 중간이 없는 것도 없는 것 같다. 한송이이거나 푸짐한 꽃다발이거나 하지 않으면 아무리 비싼 꽃도 초라해보인다. 게다가 가격대비 가성비가 너무 안 좋은게 생화다. 금방 시들고 시든 후에는 버리는 것도 일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꽃선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아는 여자들 중 꽃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연애를 글로 배우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ㅋ 근데 갑자기 무슨 꽃이지? 남편에게 택배 도착 소식을 카톡으로 알렸다.





카카오톡으로도 남편의 뿌듯함이 느껴졌다.


일단 학원 가야 하는 고사미 이른 저녁을 준비하면서 화병 박스부터 개봉했다. 박스를 개봉하자 꽃향기가 진하게 올라왔다. 이렇게 진한 향기가 나는 꽃은 오랜만이다. 꽃다발의 모양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다. 상자 바닥에 따로 고정이 된 것도 아닌데 택배로 온 꽃다발이 하나도 망가지지 않고 온 것을 보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신물류센터에서 박스의 상하를 구분해 특별히 조심히 옮긴 것도 아닐 텐데.. 꽃다발을 들고 사마귀를 떼어내 울긋불긋해진 얼굴 옆에 대고 남편에게 보낼 셀카를 찍었다. 꽃이 큰 건지 내 얼굴이 큰 건지 셀카로는 한 컷에 다 안 들어갔다. 마침 집에 들어오는 딸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가방도 벗지 못한 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진을 찍으며 물었다.


“웬 꽃이야?”

“몰라. 아빠가 보냈어. 일단 찍어.”


사진을 남편에게 전송했다. 선물 받는 사람의 자세 제1 수칙이자 유일한 수칙. 최대한 리액션은 크게. 맘에 들건 들지 않건 기쁨을 표시한다. 선물을 하기까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혹은 고민을 하지 않았더라도 나를 생각해서 선물을 준비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


“아빠가 이걸 왜 보냈을까?”

“아빠가 말 안 해?”

“카드가 있긴 한데. 이벤트에 당첨됐대.”

“무슨 이벤트?”

“몰라. 그냥 장난 삼아 이벤트를 신청했는데 당첨됐다고.”

“아빠가 하는 이벤트 아닌가?”

“왜? 무슨 날인가?”

“잘 생각해봐.”

“결혼기념일은 6월이고.. 며칠이었지? 아빠 생일은 7월이고.. 로즈 데인가???”

“로즈데이?”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며칠이지? 5월이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이벤트지? 모르겠어.”

나이가 들수록 나는 이벤트가 없어지고 남편은 이벤트가 많아진다. 기억해야 할 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남편이 분명 서운해할 텐데 기억은 나지 않고, 머리를 쥐어짜는 사이 남편이 퇴근해 왔다.

“꽃은 어때?”

꽃 택배를 궁금해하는 남편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이렇게 이중 박스에 들어서 이거랑 이거랑 예쁘게 왔다고..

“가위도 들어있다고 하던데..”

“응. 고급져 보이는데 잘 안 듦.”

“ㅋㅋ 꽃은 맘에 들어? 너무 작지 않아?”

“전혀. 쨩 고급지고 비싸 보여. 향기도 좋아.”

“다행이다.”

.

.

.

.

.

“근데 무슨 이벤트야?”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물어봤다. 내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안에 카드 있지 않았어?”

“있었지.”

“거기에 썼는데. 이벤트에 당첨되었다고.”

“그렇게 쓰여 있긴 했는데 무슨 이벤트?”

“T데이”

“5월이라고 3번인가 이벤트를 했거든. 어린이날, 어버이날, 그리고 그다음 준가 해서 총 3번 꽃다발 보내주는 이벤트를 했는데 1차, 2차는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몰릴 것 같아서 나는 3차에 했지. 그랬더니 됐다고 어젠가 문자 왔더라고. 18일에서 21일 사이에 배송된다고 하더니 빨리 왔네.”

“아~~ 그랬구나.”

“카드도 쓰라고 해서 핸드폰으로 썼지. 이렇게 쓰여지는구나. 난 T멤버십 본전 뽑았다. ㅋㅋ”

‘괜히 머리 굴리느라 힘뺐네.’


“그나저나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멋쩍게 웃으며 돌아서는 남편의 궁둥이를 팡팡 두들겨 주었다. 돌아오는  남편 생일에는 생일상을 거하게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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