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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Jun 06. 2021

남편이 보험을 해약한 이유


고사미 딸마저 백만 년 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 주말 저녁.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지만 하루 종일 집에서 주섬주섬 간식을 주워 먹은 탓에 딱히 배는 고프지 않았다. 혼자였다면 저녁 시간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배가 고프면 먹고 안 고프면 먹지 않았을 텐데 남편이 있으니 배가 고프지 않아도 끼니때가 되면 끼니를 챙겨야 한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응. 배도 안 고프다.”

“나도. 근데 지금 안 먹으면 이따 10시 넘어서 배고프다고 그러지 않겠어?”

“그러겠지?”

“그때 먹는 것 보다는 지금 조금이라도 먹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겠지?”

“굶고 자는게 제일 좋긴 한데..”

“비빔면에 고기 좀 굽고 상추 있음 상추에 싸 먹을까?”

‘굶을 생각은 없구나. ㅋㅋ’

“고기 먹고 싶어? 그러던지.”

그렇게 저녁 메뉴가 정해졌다. 상추를 씻고 면을 삶기 위해 물을 얹는 나에게 남편이 물었다.

“뭐 도와줄꺼 없어?”

“고기나 좀 구워줘.”

다른 건 내가 하는 것이 나은데 고기는 남편이 구워야 제맛이다. 그렇게 남편과 둘이 우리가 먹을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딱히 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라 저녁은 금방 준비가 되었다. 비빔면과 돼지목살구이, 상추와 알배기배추, 오이와 오이맛고추 그리고 쌈장. 건강식과 인스턴트의 오묘한 조화. ㅋㅋ 문득 앞으로 이런 시간들이 늘어날 거라는 생각이 드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기와 면을 한 입 크게 집는 남편에게 내가 물었다.


“앞으로 이렇게 우리 둘만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겠지?”

“그렇겠지.”

“그땐 뭘 하고 지낼까?”

“글쎄. 젊다면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게 많겠지만 지금보다 나이가 들었다면 시간은 많아도 할 수 있는 게 뭐 있을까?”

“그러게. 경제적 능력도 있어야 하고 건강하기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둘이 같이 있어야 할텐데, 뭐 하나 확실한 건 없네.”

“혼자 남게 된다면 나보단 당신이 더 잘 지낼 것 같다.”

“왜?”

“당신은 집순이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나는 동적이잖아.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가는 걸 더 좋아하는데 나이가 들면 혼자서 그렇게 나갈 곳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노인정에도 보면 할머니들은 많으신데 할아버지는 별로 못 본 것 같다. 할머니들은 수영장에 오셔서 수영도 배우시고 끝나고 밥도 드시고 하는데 할아버지들이 수영장에 오시는 건 못 봤네. 아~ 맞다. 바둑은 할머니들이 두시는 건 못 봤는데 할아버지들은 두시네. 나이가 들면 여자가 남자보다 즐길 거리가 많은 걸까? 아님 즐기는 종목이 다른 걸까?”

“ㅎㅎㅎ 글쎄. 그건 모르겠지만 만일 우리 둘 중에 먼저 죽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내가 먼저 갈께. 당신이 혼자 더 잘 살 껄 같으니까.”

“난 당신이 혼자 더 잘 지낼 것 같은데. 난 아는 사람이 없지만 당신은 아는 사람이 많잖아. 나이 들어 혼자 놀면 고독사뿐이 더하겠어?”

“암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이 남어.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께. 잼나게 놀다 와. 근데 알아보긴 하려나?”



나이가 들면 남자는 여성호르몬이 많아지고 여자는 남성호르몬이 많아진다더니 이 남자, 요즘 여성성이 강해지는 것 같다. 자주 혼자 남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어떤 때는 자신이 혼자 남았다가 어떤 때는 내가 혼자 남았다가 하는 답이 없는 생각에 평소답지 않게 센치해지곤 한다. 어느 쪽이건 확실한 건 혼자 남은 삶은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럼에도 누군가는 혼자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당신 나보다 오래 살 자신 있는 거 아니였어?”

“내가?”

“당신이 먼저 죽으면 우리한테 10년간 생활비 나오는 보험 해약해서 차 샀잖아.”

“그건… 오래 둬도 손해가 크다잖아. 운영을 잘못해서..”

“근데 생활비 목적이면 득이랬는데? 자기가 오래 살면 손해고.. 그래서 난 자기가 나보다 오래 살 자신이 생긴 줄 알았지.”

“…….”


ㅋㅋㅋ



자기야, 나보다 오래 살아도 괜찮아. 난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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