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같은 둘째 며느리

여우랑은 살아도 곰이랑은 못 산다던데..

by 꾸미


결혼하고 나는 목청 크고 뒤끝 없는(?) 시어머니보다 나를 동생처럼 생각해주시는 형님이 더 편했다. 아직 한참 철이 없는 남편은 시댁에서 의지할 만한 곳이 못 되었다. 얼마나 철이 없었으면 며느리에게 시댁이 친정보다 편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랬기에 갓 시집 온 둘째 며느리가 의지할 곳은 같은 처지의 짠밥(?)이 쌓인 형님뿐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시어머니가 아닌 형님께 여쭤봤다. 아마 내가 조금 더 여우 같았다면 마음 가는 형님이 아닌 시어머니께 여쭤봤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형님을 따르는 나를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이 짜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셨던 때가 종종 있으셨던 것 같다.



가장 곤란할 때는 두 분이 함께 계시면서 다른 명령(?)을 내릴 때였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없어 두 분 중간에서 서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봐야 할 때. 예를 들어 반찬이 조금 남은 경우 형님은 버리라고 하신다. 시어머니는 아까우니 냉장고에 넣어두라고 하신다. 두 분 중 한 분만 계신 자리라면 자리에 계신 분의 말씀을 따르면 되는데 두 분이 나란히 서서 기싸움을 하시면 누구 말도 따르기 애매해진다. 그냥 시어머니 말씀을 따르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사실 거의 90%는 형님 말씀이 맞다. 조금 남아 냉장고에 들어간 반찬은 결국 음식물 쓰레기가 되었으니까. 시어머니의 기분이 좋으실 때는 “며느리 둘이 시어머니를 꼭 이기려고 들어.”라는 퉁명스러운 하지만 나름 위트가 있는 말로 끝이 났지만 시어머니 기분이 안 좋으신 날은 “부잣집 며느리들이라 아까운 게 없지?”라며 비꼬시는 탓에(우리 중 제일 부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시어머니시다.) 별거 아닌 일이 별일로 커져 버리기도 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서울로 온 뒤 나의 일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틀에 한 번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는 일이었다. 남편은 당연한 듯 내게 "엄마한테 전화드렸어?"를 물었고 나는 시어머니께는 그날의 우리 집안일을, 남편에게는 그날의 시댁 일과 시어머니 기분을 전하는 (다시 생각해봐도웃기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전화를 해야 하는 날은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기분이 안 좋으셔 말도 안 되는 트집 잡으심 또 어떻게 맞장구를 쳐드려야 하지 등등 하루 종일 전화 공포에 시달렸다. 전화를 끊는 그 순간부터 다시 전화를 드려야 하는 다다음날까지는 마음이 편안했다. '드디어 쉴 수 있구나.'



하루는 용기 내 전화를 시어머니께 전화를 하지 않았다.(시어머니께 전화드리지 않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큰 용기까지 내야 했던 건지..) 조금씩 텀을 늘려볼 생각이었다. 아주 가끔 어른께 안부전화 한 통 하는 게 뭐 그리 어렵냐고 하는 사람들에게 "시어머니와 이틀에 한번 30분씩 통화해 보세요."라고 말하면 모두 입을 닫았다.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아이와 무엇을 했는지 남편은 아침을 먹고 출근했는지.. 그저 안부전화가 아닌 시시콜콜한 우리 가족의 하루 일과를 보고하는 전화였다. 더욱이 아이가 잠든 시간, 소중한 나만의 시간을 이용해야 했다. 독박 육아하시는 분들은 아실 거다.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런데 나는 나를 충전해야 하는 그 시간마저 시어머니께 할애해야 했다. 지금은 나이가 드셔 그나마 조금 완화가 되신 듯 하지만 그 당시 서슬 시퍼런 시어머니는 모든 것을 본인의 통제하에 두고 싶어 하셨다. 함께 사는 형님네 일이야 굳이 보고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니 상관없었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작은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마치 옆에 사는 것처럼 다 알아야 직정이 풀리시는 듯했다.



그렇게 용기를 내 전화해야 하는 날을 하루 건너뛰고 두배의 답답함을 참으며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린 날, 수화기 너머 들리는 싸늘한 시어머니의 첫마디는 “너 오랜만이다.”였다. 아 네.. 월요일에 전화드리고 목요일에 전화드렸는데 너 오랜만이라니.. 그 날 이후 나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틀에 한 번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생각해 보면 그 날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화를 드리는 대신에 자칭 뒤끝 없는 쿨한 시어머니처럼 따졌어야 했다. "어머니, 삼일만이 왜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궁금하신 거 있으심 어머니가 전화하시면 되죠. 전화는 꼭 며느리가 해야만 하나요?"라고. 마음속의 말을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는데 그때는 나만 참으면 되는 줄 알던 시절이었고 내 성격이 그랬다. 부딪치기보다는 피하는 것을 택하고 누구에게 좋은지도 모르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하던 시절. 큰 아이가 중학교에 간 후 아이의 시험을 핑계로 일주일에 두 번으로 전화드리는 텀이 길어졌고 운명적인(?) 그 날의 사건을 계기로 이제 나는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리지 않는다. 어버이날, 생신, 제사를 제외하고는..


팬더는 귀엽기라도 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미련스럽게 착한 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던, 기나긴 며느라기 시절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가 잘 보이려 해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다는 걸 그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다니.. 미련 곰탱이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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