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머리를 잘랐어요. 긴 머리에서 단발로. 허리와 어깨 사이에 오던 기장을 어깨와 목 사이로 줄였으니 눈에 띄게 자른 거였죠. 달라진 분위기에 주변에서 묻더라고요. 왜 잘랐느냐고. 글쎄요.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변화를 주는데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만큼 쉬운 방법이 있나 싶어요. 헤븐님은 혹시 다른 방법을 알고 계신가요? 나의 익숙한 모습에서 탈피하는 방법을요.
그동안 긴 머리를 유지했던 건 편해서였어요. 곱슬머리인 저에겐 짧은 머리가 어려워 보였거든요. 그런데 막상 자르고 나니 우려했던 것 보다 손질이 어렵지 않았어요. 어라? 의외네 하면서 살펴보니 전보다 머리카락이 얇아졌더라고요. 슬프게도 얇은 머리카락은 나이 듦의 신호인 걸 알지만 그토록 미워하던 곱슬머리가 힘을 잃어서 한편으로는 좋기도 했어요.
곱슬머리를 가장 미워하던 때는 중학교 시절인데, 모든 여학생은 귀밑 2센티로 짧게 잘라야 했어요. 그때는 머리를 다리미질하듯 좍좍 펴주는 매직 스트레이트 펌이 없었던 때라 매일 아침 전쟁을 치렀어요. 외모에 관심이 많던 시절이라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몰라요. 좋아하던 같은 반 남자아이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질풍노도의 머리’라고.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를 빗대어서 저의 불안정하고 카오스적인 곱슬머리를 그렇게 불렀어요. 어휴. 조금만 늦게 태어나거나 매직 펌이 조금만 일찍 발명되었어도 저의 중학교 생활은 조금 평온 했을 텐데.
곱슬머리는 강도가 줄었다 뿐이지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면 여전히 머리가 부슬부슬, 곱슬곱슬해요. 그런데 전만큼 싫지가 않아요. 물론 여러 기기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곱슬기는 남아있지요. 마음의 변화인지 아니면 시간의 힘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제야(!) 곱슬머리를 받아들여요.
빨강 머리를 지독히 싫어했던 빨강머리 앤이 생각나요. 앤도 열네 살이었죠. 빨강 머리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던 앤이 행상인한테서 염색약을 몰래 사요. 그런데 검정색 머리가 된다는 약속과 달리 글쎄 초록색이 되잖아요? 빨강머리 보다 더 싫은 색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초록머리가 된 앤은 침대에서 펑펑 울고 마릴라 아주머니는 기겁을 하고. 색이 도저히 지워지지 않자 보기 흉하게 된 머리를 마릴라 아주머니가 싹둑 자르는데 앤은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엄격한 마릴라 아주머니는 이런 일을 저지른 앤을 나무라지만 누구보다 속상했을 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죠.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하지만요.
그렇게 한 바탕 소동을 겪고서야 앤은 빨강머리에 대해 더 이상 불행해하거나 아파하지 않아요. 빨강 빛도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워지고 빨강머리는 더 이상 앤을 괴롭히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죠.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부단히 애쓰던 앤의 모습에서 저를 발견해요. 절대 안 변할 것 같은 빨강머리나 곱슬머리가 변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해요. 어쩌면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마음이 바뀐 것인지도 몰라요. 변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넓이랄까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것들이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어떤 일은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지지 않아요. 이를 테면 이런 거예요. 다시 돌아가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 잃어버린 것. 그런 기억은 반복해서 재생되면서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현재에 흠집을 내기도 하거든요. 어떤 노래를 듣거나 음식을 먹을 때 그 시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순간이 있어요.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의 향기처럼요. 추위에 떨고 있던 마르셀이 어머니가 건네준 마들렌을 맛보는 순간 그 강렬한 감각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일깨우는 순간이요.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있다는 건 현재보다 더 좋은 과거가 있거나 결핍을 느끼는 게 아니냐고 물으셨죠. 글쎄요. 이런 대답은 어떨까요. 어떤 자극과 감각이 일깨우는 기억은 불가항력적이고 갑자기 습격하는 것이라고요.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잊는 것도 방법일 텐데 그럴 수가 없는 일들이 있어요. 4월 16일이 되면 2014년의 그날을 떠오르죠.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만 잊으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416이라는 숫자는 자동반사적으로 그날의 기억을 일깨우니까요. 그날 이후 바뀐 삶,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해명되어야 할 것들이 남아있어요. 누가 보아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진상규명은 언제쯤 이루어질까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잊지 않겠습니다’를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무거운 공동의 기억과 사소한 개인의 기억을 나란히 놓을 수 없지만 저는 기억에 관심이 많아요. 왜 어떤 기억은 쉽게 지워지고 어떤 기억은 오래 살아남는지.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요즘 그 말에 의문이 들어요. 완전할 수 없는 기록이 과연 기억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기록의 한계가 기억을 결정하는지도 몰라요. 기록에서 박탈된 것은 기억되지 않는 방식으로요. 제 블로그 이름도 ‘시간의 기록’이잖아요? 사실 깊은 고민 없이 지었는데 무의식이 작동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예언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과 기록, 기억이 라는 주제가 저를 놓아주지 않아서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라는 이탈리아 물리학자의 책을 읽었어요. 누군가에게는 4월 16일이 분기점이 되어서 시간이 멈춰있죠. 흐르지가 않아요. 그런데 이것이 은유가 아니라 정말 물리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어요. 반면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는 걸 생각하면 시간이라는 건 참 신비로워요.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뇌가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면 기억이 만들어낸 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이겠지요. 사건의 강도와 충격에 따라 기억의 수명이 결정되는 것이겠고요. 기억이 ‘입맞춤의 네트워크’라면 첫 입맞춤, 첫 사랑, 마지막 만남, 마지막 여행, 그 밖에 모든 특별한 사건의 여파는 한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요. ‘현실은 오직 기억 속에서 형성된다.’고 기록했던 프루스트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프루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의지했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사교계에 발을 끊고 방안에 틀어박혀 13년에 걸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썼다고 해요. 그렇게 11권으로 된 작품이 탄생하는데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이 방대해서 다 읽지는 못 했지만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요?) 제목과 형식만으로 상징적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작가에게는 수많은 작품보다 불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작품이 중요한지도요.
그렇다면 소설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사건이나 기억을 글이라는 형태로 고정해서 쓰는 사람이 아닐까요? 사진을 찍듯 순간을 박제해서요. 기억을 글로 옮기는 작가들이 종종 기억에서 해방된다고 말하는 건 글을 통해 벗어날 수 있기 때문 일거에요. 한번 쓰고 나면 더 이상 생각을 안 할 수 있으니까요. 글이 대신 기억하는 것이겠죠.
기억이란 정체성이라는 말. 인간은 기억이다, 라는 말을 되새겨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어서 허무하기도 하지만 그 시간을 글로 박제한다면 허무를 벗어나거나 구제하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혹은 시간에 저항하고 맞서 싸우는 가장 멋진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렇게 믿고 싶어요. 쓰다보면 괜찮지 않은 일도 괜찮아질까요?
아...어쩐지 지난번과 비슷한 말을 늘어놓은 것 같아요. 시간과 기억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흥미로운 주제여서 도돌이표처럼 돌아가네요.
편지 쓰는 이 시간을 기억하며,
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