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다르게 적히죠

by 김성민


사월의 편지를 읽으면서 헤븐님이 얼마나 알뜰하게 대학시절을 보냈을지 상상했어요. 꼼꼼하게 수익과 지출을 관리하듯 시간 관리하는 습관이 그때부터 있었구나, 그래서 그 많은 걸 해낼 수 있었구나! 24시간이라는 선물을 허투루 쓰지 않는 모습이 그려졌어요. 가계부라는 말을 빌려서 ‘시계부’라고 하던가요? 시간 가계부. 가계부를 쓰듯 시계부를 쓰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한눈에 보이겠어요. 하루에 핸드폰 사용하는 시간, 글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엉뚱한 뉴스를 보는 시간, 아마도 저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구멍을 볼 것 같아요. 시간이 줄줄 새는 구멍이요. 아... 보기가 꽤 괴로울 것 같네요.



저는 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을 만회해보고자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보낸 것 같아요. 특히 동아리 활동을 꽤 열심히 했는데 학내 시사 웹진 동아리였어요. 매달 한번 업데이트되는 웹진을 위해 기획회의를 하고 각자 맡은 주제를 취재하고 쓰고 편집하고. 방학도 기꺼이 반납하고 활동했던 기억이 나요. 동아리방은 컴퓨터가 일렬로 놓여있는 컴퓨터실이었는데 마감 무렵이 되면 열기가 후끈했어요. 머리에서 나는 열기, 컴퓨터에서 나는 열기. 온갖 열기로 그 시절을 뜨겁게 불태우고 싶었겠죠?



대학시절을 추억할 때 동아리 생활을 빼면 밋밋할 만큼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만큼 공부에 소홀하게 되어 재수강을 해야 하는 사태가 종종 벌어졌지만... 핑계를 대자면 이론보다 실습을 중요하게 여긴 학과 분위기에 휩쓸린 면도 있어요. 아마도 정점은 경찰 파출소에서 보낸 24시간일 거예요. 기사 쓰기 수업 일환으로 원하는 학생만 신청을 받았는데 단 네 명만 신청해서 신촌 지구대에서 일일 체험을 했어요. 기사 쓰기라는 것이 경찰서에 가서 사회 뉴스가 될 만한 보도 자료를 받아서 쓰는 것이었거든요. 밤샘 순찰을 하고 사건이 있으면 출동하는 경찰과 동행하며 관찰하고 기록하는 체험이었어요. 그때 파출소에서 맞이한 희뿌연 새벽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사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대학생활은 학생식당에서 김밥을 먹으려고 긴 줄을 서거나 친구들과 팀플을 하며 보낸 시간일 텐데 그러한 무수한 기억보다 희소한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기억은 참 선택적이죠? 아마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일을 겪고도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겠죠. 사소한 기억의 차이가 오해를 부르고 착각을 일으키는 걸 생각하면 같은 것을 얼마나 다르게 인식하는지 싶어 놀라곤 해요.



결국 글은 기억을 쓰는 게 아닐까요? 과거라는 기억을 현재로 불러와서 글로 옮기는 것. 고정불변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따라 재해석되고 재발견되는, 살아 움직이는 과거를 써요. 기억이 선택적이듯, 그렇게 글쓰기는 과거라는 시간을 재구성하고 편집하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소설가 은희경이 『빛의 과거』에서 과거를 폐기할 수 없지만 편집하고 유기할 권리는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던 것처럼요.



헤븐님은 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싶은 과거가 있나요? 저는 ‘나 다시 돌아갈래!’ 하고 외쳤던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과거로 돌아가서 묻고 싶은 때가 있어요. 이를테면 이런 때인 거죠. 내 안에 있는 여러 자아가 충돌할 때. 학교와 사회에서 학습된 여성상과 가정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이 격렬히 부딪힐 때.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배신한 것 같을 때.



대학시절의 반전은 졸업 전에 한 결혼이에요. 막 달리던 기차를 갑자기 멈춰 세운 것처럼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과 6개월 만에 한 결혼이었어요. 저보다 일곱 살 많은 사람이고 여러 상황과 맞물려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었어요. 졸업학기를 앞둔 겨울에 처음 만나고 두 번째 만났을 때가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어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저는 남성용 화장품을 건넸고 책 한 권과 빨간색 다이어리를 선물로 받았어요. 책은 나심 니콜라스 탈렙이라는 레바논 출신의 미국인이 쓴 『fooled by randomness』라는 경제서였어요. 실제로는 확률의 불확실성을 담은 철학서이고요. 지금은 『행운에 속지 마라』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지만 당시에는 번역본이 없는 영어 원서였어요. 아니, 이제 막 알아가는 사람에게 경제 철학 영어 원서라니. 이게 뭐지? 이 사람 무슨 뜻으로 이런 책을 주는 거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특이한 선물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주었을 뿐이지만 받는 저는 얼마나 어리둥절하던지.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전혀 관련 없는,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선물이 아닌 자기 자신이 주고 싶은 책을 건네는 남자가 신기했어요. 이런 선물을 건네는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겨서 암호를 해독하듯 여러 번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책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우리 두 사람의 차이였을까요?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번역본이 나오고도 바로 읽지 않다가 얼마 전에야 읽었어요. 금융시장을 비롯한 삶의 여러 영역에서 작동하는 운의 역할을 말하고 있어요. 확률이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블랙 스완’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심 탈렙은 이렇게 말해요.



운은 준비된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열심히 일하고, 시간을 잘 지키고, 깨끗한 셔츠를 입고, 향수를 사용하는 등 일상적인 통념을 따르면 성공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통념을 따른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끈기와 인내 같은 전통적 가치들도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즉, 성공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혼동하지 말자. 성공한 사람들이 모두 똑똑하고 근면하며 인내심이 있다고 해서, 그 반대로 똑똑하고 근면하며 인내심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성공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을까요? 행복한 결혼을 위한 완벽한 조건이 있다고 해서, 완벽한 조건이 전부 행복한 결혼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결혼은 결혼의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처음부터 완벽한 결혼생활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완벽하기를 포기할 때, 완전한 이해를 단념할 때, 비로소 행복한 결혼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고요.



맞아요. 저는 기억과 시간을 편집하고 재구성하면서 쓰고 있어요. 해독할 수 없었던 선물의 의미를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결혼이 가져온 여러 물음표에 대답을 찾으려고. 아마도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그것이 살아있는 과거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일거에요.




덧,

오늘 이런 문장을 만났어요.


무엇보다 감정이 먼저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래야 어떤 사람, 어떤 사물, 그리고 어떤 사건이 우리 시선에 의미 있는 것으로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헤븐님의 감정이 pause 가 아니라 마음껏 play 하기를 바라는,

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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