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언어 이해하기

by 김성민



편지와 함께 올리신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홀로 시간 보냈을 헤븐님을 생각했어요. 침대에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는 그림 속 여인과 달리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는 모습을요. 그 옆에는 책과 맥주 반잔이 있겠고요. 아, 좋아하는 음악도 흘렀겠죠.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요? 혼자라는 환경설정이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한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엌 식탁 한구석에 초록색 독서등을 두었어요. 흔히 빈티지스럽다고 말하는 아담한 등인데 혼자 있는 밤을 밝혀주고 있지요. 등 옆에는 노트북과 책이 있고요. 보통은 그뿐이지만 조금 느슨해지고 싶은 날이면 저는 맥주보다 와인을 선호해서 와인 잔을 놓을 것 같아요. 이렇게 적고 보니 혼자 있으면서도 챙길게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음, 기분을 창조하는 공간이 되려면 이 정도의 준비는 필요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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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말고도 기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있죠. 저의 두 아이가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한답니다. 특히 열 살인 둘째는 제가 첫째인 형을 더 사랑한다고 굳건히 믿고 있어서 언제나 불만이 많아요.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도 충분하지 않은지 절대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처럼 끊임없이 애정을 바라거든요.



생각해 보니 헤븐님과 아들 둘을 키운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흔히 아이가 자라듯 엄마도 자란다고 하는데 저는 두 살 터울의 남자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자라고 있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하면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 아이도 엄마를 키우는 것이겠고요. 출산이 제2의 탄생이라고 하던가요? 엄마로 태어난 지 올해로 12년 차가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탄생’이라는 말에 종종 의문이 들어요. 그러니까 출산이란 나를 잃어버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불가리아 계 프랑스 사상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했다고 하죠. ‘어머니가 되는 것, 아이를 낳는 것은 이방인을 환대하는 행위이며, 그 결과 어머니 노릇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가까운,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낯섦과의 가장 강렬한 형태의 접촉이 된다’ 고요. 아이는 나의 자궁에서 나왔지만 순전히 낯선 존재인 거죠. 마치 이방인처럼요. 대체 누굴 닮아서 그러니?라고 물으면서도 환대하는 것이 ‘어머니 되기’라고 해요. ‘이방인’이라고 하니까 유전자의 책임에서 조금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머니’가 되고 나서 스스로 놀라기도 하죠. 아이가 아니었다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을 한다거나 더 이상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요. 나의 생활 패턴에 결정적 변화들이 생겨요. 나 원래 안 그랬는데! 소스라치게 외치는 그 순간이 ‘우리 자신의 낯섦과의 가장 강렬한 형태의 접촉’이 아닐까 싶어요.



헤븐님도 출산 후 두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고 하셨죠. 특히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요. 인간의 사랑은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말하는 ‘사랑한다'. 저도 공감해요. 진부한 말이지만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대사 중 하나는 수학자 존 내쉬의 삶을 다룬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 나오는데, 정확히 옮기려고 찾아봤어요.



‘나는 내 경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했습니다. 그건 어떠한 논리적 추론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이라는 신비한 방정식 안에만 존재합니다.’



게임이론을 발견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오랜 정신질환으로 투병했던 존 내쉬를 구원한 건 학문적 성취나 명예가 아니라 사랑이었어요. 그의 부인이 감내했던 인내와 고통은 도저히 논리적 설명으로는 불가한 사랑이라는 방정식이었지요.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만큼 지적 능력이 탁월한 사람도 사랑은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었나 봅니다. 그러니 제가 사랑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사랑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언제나 실패하는 기분이 들어요. 어쩌면 모든 예술은 결국 사랑의 다른 말이 아닐까요? 혹은 사랑에 대한 추신 같은 거죠. 사랑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찾을 수 없어서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존 내쉬는 사랑으로 구원받았지만 매우 운 좋은 경우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사랑이 모든 것을 구원’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한 것 같아서요. 인간의 사랑이 상대에게도 사랑의 형태로 받아들여질 때만이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행동이 상대에게 사랑이 아니라 고통이라면 구원이 아니라 파멸이라는 생각을 해요. 때문에 인간의 사랑은 모든 것을 구원하는 기적을 행할 수 있지만 동시에 비극일 수도 있음을요.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건 비극을 막는 일이겠지요. 어떻게 사랑이 사랑일 수 있는지. 사랑이 위협이나 폭력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일 수 있는지 말이에요. 사랑이라고 했던 행동이 상대에게는 사랑이 아니라 부담이었다는 걸 알게 될 때 사람들은 경악하는데, 흔히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상대의 사랑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말이겠어요. 누군가는 인정의 말을 들을 때, 선물을 받을 때, 함께 시간을 보낼 때, 혹은 스킨십을 할 때, 사랑을 느끼죠. 나의 사랑의 언어가 무엇인지 알고 상대의 사랑의 언어를 알 때 비로소 사랑이 사랑의 형태로 흐르고 통하는게 아닐까해요.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라는 둘째 아이의 투정이 익숙해요. 제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아이가 가진 사랑의 언어를 제가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의 투정은 사실 저의 투정이었어요. 엄마 앞에서 자존심 세우는 딸이었던 저는 엄마의 사랑을 맹렬히 원하면서도 엄마한테 무관심한 딸을 연기했어요. 외부 일로 바쁜 엄마는 저의 말을 사소하게 여겼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엄마와 심정적으로 멀어졌죠. 엄마에게 무관심함으로써 나를 방어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엄마는 저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하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는 당신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하셨지만 저는 그 최선을 알지 못했어요. 그것이 바로 사랑의 비극 아닐까요?



아이를 낳으면서 젊은 시절의 엄마, 내 나이였을 때의 엄마를 다시 만났어요. 누군가는 엄마가 되니 비로소 엄마를 이해한다고 하던데 저는 정반대였어요. 엄마를 더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요. 어린 시절, 왜 엄마는 다른 엄마처럼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져오지 않는지, 왜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아무도 없는지를 사랑의 척도라고 여기며 엄마를 판단했어요. 엄마가 된 딸이 엄마를 심판하는 재판관이 되어서 말이죠.



‘제도화된 모성이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핵심원리’라는 말이 있어요. 모성애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본능적인 사랑’이라고 정의되는데 왜 나는 모성애가 없나, 아이가 태어났는데도 나는 왜 여전히 내 것, 내 할 일을 놓지 못하고 중요하게 여기는지 저는 고민했어요. ‘모성애’ 하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연상되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그건 정확히 엄마를 향한 질문이었어요. 왜 엄마는 엄마의 일이 자식들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그건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일도 아닌 순수하게 자발적인 엄마의 선택으로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엄마가 저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을 정확히 제가 아이들에게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모성애에 갇혀 엄마를 심판하고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건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요.



모성신화를 해체하는데 일조한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나는 아이가 있는 엄마가 다른 성보다 도덕적으로 더 믿을 만하다거나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된다고 하여 특별히 더 성숙해지거나 바다와 같은 넓은 품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요. 모성신화의 민낯은 해방으로 느껴져요.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창조적이면서 파괴적인 에너지’를 인정하듯 모성애의 양가성을 인정한다면 엄마를 좀 더 이해하고 아이에게 어떤 엄마가 될지 조금 더 다양한 선택지를 갖게 될 것 같아요.



사랑의 언어가 다르듯 모성애 역시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을 이제 알아가고 있어요. 엄마는 엄마의 방식대로 저를 사랑했다는 것을요. 그 사랑의 언어를 아는데 저는 30년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아이가 당장은 아니더라도 제가 전하는 사랑의 언어를 알게 되면 좋겠어요. 물론 그전에 제가 먼저 아이가 가진 사랑의 언어를 알아야겠죠. 모성애가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엄마 되기’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으니까. 나도 여전히 엄마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나 자신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의 언어를 배우고 있는,

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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