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님의 오월, 안녕하신가요. 언젠가 오월을 지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오월이 가족의 달인 이유는 화창한 신록의 계절을 핑계 삼아 소원했던 가족끼리 같이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 아닐까. 지난편지에서 ‘자기만의 방’을 떠올린 건 분주함이 예상되어서였나 봐요. 책으로의 깊은 침잠이 없는 나날은 뭐랄까, 저를 메마르게 하는 것 같아요. 지적인 영양이 충족되고 공급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공급이 중단될 때 심한 기갈을 느껴요. 메마름으로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니까 몰입할 수 있는 책 한권의 시간은 심리적 수분이자 영양공급인데 말이죠. 그런데 뭐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해서 가장 건강한 상태는 자기만의 방에 갇혀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 안팎을 활발히 드나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일상이 현실감각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니까요. 일상과 비일상을 원활히 넘나들며 찰랑찰랑 물기 있는 생활을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 편지 쓰는 시간은 촉촉해 지기 위한 수분공급이자 일상을 위한 ‘자기만의 방’입니다.
수전에게도 ‘19호실’이 일상을 유지해주는 비일상의 공간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19호실을 수전의 ‘자기만의 방’이라고 이름 붙였고요.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에 가다』는 아무래도 여러 질문을 던지는 흥미로운 소설이 틀림없어요. 헤븐님의 질문을 좀 더 이어가볼게요. 소설에서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착한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인지, 그리고 결혼 이후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하는 물음들을요.
저는 엉뚱하게도 수전의 남편 매슈의 입장에서 소설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어요. 수전이 갑자기 의문스런 행동이나 요구를 해도 매슈는 캐묻는 대신 수전이 원하는 대로 해주죠. 그것이 매슈가 지닌 지성의 힘이었을까요? 좋은 직장을 갖고 있는 안정적 지위를 향유하는 금발 미남 매슈.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남성의 아량 같은 것 말이죠. 질투나 날선 감정을 처음부터 내보이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일 테고 그에겐 감정이 섣부르게 나가지 않도록 두터운 이성이 버티고 있었어요. 묻지 않음으로써 아내를 향한 신뢰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고요. 아니, 어쩌면 애인이 있으니까 수전이 무엇을 하든 관대하거나 완전한 무관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참아주는 낯선 사람들이 되었어요.
수전이 19호실에 가기 위해 자신을 대신할 ‘안주인’을 고용했듯 매슈 역시 애인을 만나기 위해 어떤 상황들을 통제하고 꾸몄겠지요. 두 사람 모두 가정을 위해 각자가 그어놓은 선을 지키기 위해서요. 헤븐님 편지에서 매슈와 달리 수전이 보여준 것은 ‘본능에 굴복하지 않고 선을 넘지 않는 고귀한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 주셨어요. 에리히 프롬의 말을 떠올리면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타인과 사랑하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려면 내면으로 가야한다’고 했지요. 프롬에게는 사랑의 기술이 곧 존재의 기술이었으니까, 사랑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한다고 말했으니까, 완전히 혼자가 되어 자신에게 집중했던 수전은 프롬이 보기에 홀로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인물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수전의 홀로 있음이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아요. 수전은 매슈처럼 다른 누군가를 만나지 않죠. (매슈가 갖는 만남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요). 수전이 다른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선(線)을 지키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선(善)한 사랑인지는 모르겠어요. 매슈의 행동이 원초적 욕망에 따른 일탈이라면 수전이 규칙적으로 19호실에 가는 것 역시 혼자 있고 싶은 욕구에 따른 일탈 아닐까요. 수전은 더 이상 아이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고독만을 생각하는 걸요. 선(線)이 선(善)을 결정하는 걸까, 묻고 싶어요. 아, 참 대답하기 어렵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착한 사랑은 없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 제목처럼 ‘착한 여자’의 사랑은 가능해도 ‘착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요. 왜냐하면 사랑이 필연적으로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사랑을 그만두어야, 시작하지 않아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착한 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것, 이라는 이상한 말을 하게 되네요. 저는.
수전에게 결혼 이후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요. 결혼 10년차쯤 넘어서 부부 상담을 받은 적이 있어요. 처음 몇 번은 같이 상담을 했는데 서로를 의식하다보니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아 각각 따로 상담을 받았어요. 그때 상담하신 분이 말씀하셨죠. 처음 사랑을 기억하라고. 그 사랑을 회복하라고. 만약 회복할 사랑이 없다면? 그렇다면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라고 하셨어요. 처방을 받았지만 처방대로 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요. 처방전대로 성실히 약을 먹고 정성스럽게 돌봐야 회복되는 것처럼 사랑 역시 의지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닐까 해요.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고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면 말이에요.
혹시 도리스 레싱이 데이비드 로렌스의 『채털리부인의 연인』을 극찬한 것을 아시나요? 레싱은 『19호실로 가다』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지요. 두 사람의 지성은 결혼생활에 단조롭고 메마름을 낳을 따름이라고요. 레싱의 결혼에 대한 시선은 로렌스의 소설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해요. 전쟁으로 하반신이 불구가 된 남편 클리퍼드와 아내 코니는 정신적 삶을 유지해요.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고 갖지 않아도 클리퍼드와의 지적인 대화만으로 흥분을 하고 사랑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코니는 점점 눈을 뜨게 되죠. 정신의 삶은 차츰 공허해지고 그들의 결혼 생활은 습관적인 친밀함이라는 것을요. 코니는 거울에 자신의 벗은 몸을 비춰보며 각성의 순간을 갖게 되어요. 남편이 늘어놓는 말은 백치의 말, 그저 무수한 말뿐이라고요. ‘바로 정신적 삶 때문이다! 갑자기 그녀는 격분이 치밀어 오르며 그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혔다. 그건 사기였다!’ 로렌스는 코니의 입을 빌려 결혼생활에서 정신적 삶은 사기라고 말하고 있어요. 저는 이것이 레싱이 말한 ‘지성의 실패’와 통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수전을 구원하는 건 자기만의 방, ‘19호실’이 아니라 코니가 실천하는 ‘정신과 육체의 조화’였을까요? 수전이 만약 사랑을 나누고 관능적 기쁨을 추구했다면, 사막같이 메마른 결혼생활이 촉촉하게 차오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레싱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아요. 수전이 매슈처럼 다른 관계를 맺었다면 적어도 호텔방에서 가스를 마셔가며 외롭게 잠들지는 않았겠죠. 그러니까 원초적 욕망은 죽음이 아닌 오히려 생생한 삶의 증거가 아닌가 묻고 있어요. 무언가를 강렬히 욕망한다는 것. 그것은 죽음과 정반대에 있는 것 같아요.
욕망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디까지 크기를 키울 것인가, 어디를 향할 것인가가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어떤 역사학자는 욕망을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이라고도 말하니까요. 욕망은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고 발전하게 만드는 그런 힘이라는 것을요. 수전이 19호실로 가는 뒷모습이 쓸쓸하고 살아있는 죽음의 모습이 보이는 건 혼자 있음이 팔팔한 욕망의 발로가 아니라 어떤 체념의 결과이기 때문이겠지요.
레싱이 다른 소설에서도 결혼이라는 제도로 불행해지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듯,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제도와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어요. 그들의 결혼이 잘못된 건 그들 탓이 아니라 세상 탓이라고 말했으니까요. 『채털리부인의 연인』에도 비슷한 문장이 나와요. ‘그것은 그 여자의 잘못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사랑의 탓도 아니었고, 섹스의 탓도 아니었다. 잘못은 바로 저기, 바깥에, 저 사악한 전기 불빛과 덜컥거리는 저 악마적인 기계소리에 있었다.’
로렌스는 기계문명을 비판했어요.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 활짝 꽃피는 코니를 통해 로렌스는 말하고 있어요. 성은 약동하는 생명이다. 그것이 로렌스가 생각한 전쟁이 만든 비극적 시대를 지나는 해결책이었지요. 하지만 문학은 다른 예시도 보여주고 있어요. 마담 보바리의 엠마나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의 비극적 결말을요. 이렇게 단순하게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는 지금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음...결혼 이후의 사랑이라는 질문에 저만의 답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언제쯤 찾을 수 있을지...
사랑을 계속 탐색하고 싶은,
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