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by 김성민



헤븐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 이것은 얼마나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 인가. 아니, 왜 꺼내기 어려워야만 하는가, 하고 말이죠.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요. 금기는 언제나 욕망을 만들고 욕망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건 욕망이 부정적이고 위험하게 인식되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성적 욕망에 대해 알아가는 건 미성년자가 19금 도서를 몰래 보는 것처럼 금지된 영역을 건드리는 기분이에요. 아니, 이제 10대 아이들을 키우면 그만큼 경험치가 쌓였을 텐데 도대체 저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그러니까 저는 제 안에 얼마나 많은 금기들이 자리하고 저를 억압하고 있는지 새삼 확인했어요. 기독교의 보수적인 가정과 가부장적 분위기에 둘러싸인 상황이 저를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요. 요즘 읽은 책들은 그러한 금기들을 하나하나 부수면서 어떻게 해방되고 벗어날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할까요. 과감하고 대담한 이야기들.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상상력의 영역일지라도 엄격하고 모순된 사회를 변화시켜 왔던 생각의 씨앗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답니다.



데이비드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여인』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어쩌면 인간의 영혼은 외도를 필요로 하며, 그것을 거절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도의 의미는 바로 가정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점에 있다.’ 로렌스는 성을 약동하는 생명으로 보았고 쇠락해가는 코니가 다시 생생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몸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 덕분이었어요. 코니는 정신적 삶 뿐 아니라 육체적 삶이 함께 해야 진정한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사냥터지기 멜러즈를 통해 알게 되죠. ‘남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성행위를 하고 여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잘되리라고 난 믿소.’라고 말하는 멜러즈와 결합하기 위해 코니는 남편 클리퍼드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 해요. 하지만 클리퍼드 입장에서 보면 코니가 말하는 사랑을 인정할 수가 없지요.


로렌스의 작품을 읽으면서 톨스토이가 떠올랐어요. 여성 심리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요. 흥미롭게도 로렌스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독후감을 남겼는데 안나의 죽음이 불만스럽다고 말했어요. 로렌스였다면 안나를 기차에 뛰어들게 하지 않고 브론스키와 사랑을 유지하도록 그리지 않았을까요. 생명력 넘치는 안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 속 코니와 비슷해요. 코니는 ‘청어처럼 삐죽하니 깡총한 계집애가 아니고 살찌고 팔팔한 송어’라고 묘사되지요. 톨스토이는 성적 매력으로 대변되는 넘치는 생명력을 통제하지 못한 안나를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했듯이 제도와 욕망의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어요. 로렌스가 반대한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겠지요. 로렌스는 성적 욕망이 오히려 제도(세상의 모든 것)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으니까요. 코니의 생명력은 코니를 살렸지만 안나의 생명력은 안나를 죽인 셈인거죠.






톨스토이가 『채털리부인의 연인』을 읽었다면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요? 소설가에서 교육자, 성자가 되고자 했던 톨스토이였기에 코니와 멜러즈에 대해 어떤 평을 했을지 궁금해요. 로렌스가 안나의 비극에 불만을 가졌듯 톨스토이도 코니의 외도에 불만을 가졌을 것 같아요. 톨스토이의 외도에 관한 생각은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지요. ‘당사자의 진실한 감정에만 의존하고 사회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는 애정관계는 힘이 달려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당시 귀족 사회의 흔한 커플처럼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은밀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 안나는 타협하지 않지요. 자신의 순수한 사랑이 사회관습보다 더 강하리라 믿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회적 비난과 현실의 벽은 높았고 브론스키가 자신을 배신하고 있다고 의심한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복수하기 위해 기차에 몸을 던져요. 『안나 카레니나』에 제사로 쓰이는 성경 구절,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는 말은 외도를 한 안나를 심판하는 톨스토이의 목소리처럼 들려요. ‘섹스는 타락의 원인이라고 비난하고 본질적으로 반사회적이고 이기적인 악한 힘’이라고 보았던 톨스토이. 반면 로렌스는 따뜻한 마음으로 하는 섹스가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생각했기에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어요.



톨스토이는 소설 속 인물을 죽음으로 심판했지만 정작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시절을 보냈어요. 자신보다 열여섯 살 어린 어린 소냐와 결혼하면서 결심하지요. 아내를 만나기 전 오랫동안 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 바람을 피우지도 아내와 이혼하지도 않겠다고 마음을 먹어요. 아이들을 열세명이나 낳을 만큼 두 사람은 대가족을 이루었지만 ‘죽을 때까지 싸웠던 부부’라고 해요. 가정을 견디지 못하고 톨스토이는 결국 가출했고 가출한지 열흘 만에 객사해요. 안나 카레니나가 몸을 던진 그 가차 역에서요. 비극적인 죽음이지요. 톨스토이는 그의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남자는 자신의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결혼하는 반면, 여자는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남편을 정신적으로 지배할 목적으로 결혼한다.’ 톨스토이의 결혼관이었지요.



Leo Tolstoy and his wife Sophia, (Repin 1907)



결혼제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어요. 개인마다 다양한 결혼관을 갖고 있고요. 사랑의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말한 결혼의 정의에 따르면 좋은 결혼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해요. (헤븐님 덕분에 에바 일루즈의 책을 다시 펼쳐보았어요.) ‘역할에 알맞은 감정을 느끼고 도덕적 테두리에서 서로 약속을 지키라는 의무감의 명령’이요. 사회적 역할에 따른 충실한 연기를 해야만 유지되는 결혼이라면 결혼 스스로 자연스러운 제도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현재의 결혼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고 정착되어온 하나의 사회제도라는 것을요. 교과서에서 말하는 사회의 가장 기본단위인 가정. 그러니까 안정적인 사회를 위해서는 가정이 잘 유지되는 것이 필수 이겠고요.



그러데 그러한 결혼의 목적이 여성을 종속시킬 뿐 아니라 국민을 노예로 만드는 권위적인 이념을 유지하는 것으로 본 학자가 있었어요. 사회가 욕망을 억압하고 성의 자유를 억압한다고요. 결혼은 사회질서가 유지되기 위한 것이다, 라고 말한 빌헬름 라이히.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그의 책 『성혁명』에서 결혼제도를 없애고 그 대신에, 두 파트너가 경제나 가족 면에서 서로 전혀 의존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갖는 성적 욕망에 기반을 둔 커플 제도를 만들자고 주장해요. ‘이 커플 관계는 두 파트너 중 한 사람에게서 욕망이 사라지면 끝난다. 라이히에게 사랑은 육체와 독립된 현상이 아니었다. 그에겐 사랑이란 함께 경험한 쾌락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또 무엇보다 앞으로 함께할 쾌락에 대한 기대일 뿐이었다.’ 더 나아가 ‘성을 자유롭게 한껏 누리는 일은 민주주의를 기능케 하는 무척 중요한 요건’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로렌스가 떠오르기도 해요.



빌헬름 라이히의 말은 급진적으로 들려요. 1930년대에 나온 책인데도 말이죠. 열네 살에 라이히는 어머니가 자신의 가정교사와 불륜을 맺고 있는 것을 아버지에 알렸고 이로 인해 어머니는 자살해요. 당연하게도 큰 충격을 받았고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무거운 사건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라이히가 말하는 ‘성혁명’은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 같아요. 그는 도래하지 않은 사회를 그리며 어머니를 죽음으로부터 살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 헤븐님께 많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쏟아낸 것 같아요. 이번 편지를 쓰면서 궁금한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찾아본 책들이 있었거든요. 발견한 내용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편지가 길어졌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결혼에 대한 이야기.


‘사랑은 왜 아픈가’, ‘사랑은 왜 끝나는가’ 라고 말한 에바 일루즈는 사랑의 종말에 대해 진단하고 분석하잖아요? 일부일처제에 대해 ‘서로에게 충실한 정절과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신뢰는 냉소와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냉정하게 말하지요. 관계를 쉽게 시작하고 쉽게 끝내는 시대, 이제 결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결혼식과 결혼제도가 무겁게 느껴져서 프랑스에서는 팍스라는 제도가 발명된 것 인지도요. ‘시민연대계약’이라고 건조하게 불리지만 실제로는 동거라고 보아도 좋은 제도가 결혼 보다 더 흔하다고 해요. 결혼이라는 제도가 역사의 산물이고 시대에 따라 발명된 것이라면, 사회 변화에 따라 결혼제도 역시 조금씩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어요.



이번 주에 결혼식이 있어요. 전통적인 방식의 결혼과 가정이 약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결혼하는 커플들은 생생하고 눈부셔요. 결혼식에서 흐르는 설레는 긴장과 떨림. 그러한 흥분이 한 순간의 찰나일지라도 그 찰나의 순간이 두 사람에게 새로운 챕터를 여는 인생의 한 페이지가 되겠지요. 헤븐님도 그런 순간을 간직하고 계시겠지요?




찰나의 순간을 더듬더듬 기억하며,

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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