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현실을 둘 다 지키고 싶다는 헤븐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슬며시 웃음이 났어요. 저 역시 그런 욕심이 있거든요! 낭만과 현실, 둘 다 갖는 건 욕심이지만 누구나 꿈꾸는 바람이 아닐까 싶어요. 낭만 없는 현실은 퍽퍽하고 현실이 빠진 낭만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같아서요. 적절한 배합으로 낭만과 현실을 두루 누릴 수 있다면, 현실이 낭만의 기운을 윤활유 삼아 원활히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아요.
사전에서 ‘낭만’의 뜻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결혼은 현실이고 현실은 생활이죠. 현실에 매이지 않는 것을 낭만이라고 하니, 애초에 결혼과 낭만은 동거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성격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낭만은 사치라고 하는 걸까요?
10년차 넘은 부부에게 아이 둘이 있어요. 초등학생 아이들이죠. 부부는 아이들 취향대로 식당을 고르고 아이들 학원 스케줄에 맞춰서 여행을 가요. 평일에는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요. 여자는 집안에서 살림을 해요. 살림이라고 하면 거창하고 집안을 유지하는 수준이죠. 치약이나 두루마리 휴지 등 생필품 재고를 확인해서 채우고 그날의 반찬과 저녁거리를 궁리해요. 음식을 직접 만들거나 주문하기도 하고요. 먹는 건 순식간이고 치우는 건 시간이 더 걸리죠. 설거지를 하고 냄새 나는 행주를 삶아요. 아이들은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씻고 샤워를 해요. 화장실에 들어가면 변기에 오줌 자국이 묻어있고 욕조에는 머리카락이 들러붙어있어요. 여자가 정리하는 동안 남자는 아이들을 챙겨요. 여자가 아이들을 챙기면 남자가 정리를 해요. 서로 분업하는 거죠. 대충 정리를 마치면 하루를 마감할 시간이 되요. 이제야 느긋하게 앉아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눌 수 있겠지만 여자와 남자는 피곤해서 보통 생략하고 말지요. 그래도 가끔 기분전환 삼아 마시는 와인이 피곤을 종종 씻겨줄 때가 있어요. 어쩌면 결혼생활에서 낭만이란 잠들기 전에 마시는 와인한잔의 휴식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다 늘어진 티셔츠와 펑퍼짐한 파자마를 입고 마시는 와인이니까, 음...어쩐지 낭만적이기 보다 현실적인 것 같네요?
과연 결혼이라는 현실에서 낭만이 유지 될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낭만과 현실은 시소 같은 관계가 아닐까요. 낭만이 높아질 때 현실은 낮아지고, 현실이 높아질 때 낭만은 낮아지는 관계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헤븐님이 꺼내신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으면서 보바리 부인, 엠마가 가진 낭만적 성격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엠마의 낭만은 그녀가 가진 매력, 우아함을 더욱 빛나게 해주지만, 동시에 추락의 원인이 되기도 해서요.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고 철저히 관리하시는 헤븐님이 볼 때, 엠마가 얼마나 못나보였겠어요. 사치스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결국 파산에 이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엠마에게 독자는 어디까지 동의를 할 수 있을까 싶은 거죠.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낭만을 이렇게 해석해요. ‘주로 문학에서 유래한 그림 같은 가능성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몽롱한 상상에 빠지는 버릇이 특징인 상태’ 낭만은 몽상적이라는 의미와 가깝다고 해요. 엠마에게 낭만적 몽상의 바탕은 수녀원에 다니던 소녀시절에 읽은 로맨스 소설이에요. ‘그 내용은 한결같이 사랑, 사랑하는 남녀, 쓸쓸한 정자에서 기절하는 박해받은 귀부인...’ ‘천박한 낭만소설’들이라고 요약되지요. 낭만 소설은 상상력을 부풀리고 과잉된 낭만은 현실을 불만스럽게 만들어요. 엠마는 현실 속에서 낭만적 몽상을 살고 싶었어요.
‘흰 깃털로 장식한 기사가 검정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세월을 보내고 싶었던’ 엠마였기에 시골의사 남편 샤를르가 지나치게 평범해 보일 수 밖에요. ‘샤를르가 하는 말은 거리의 보도처럼 밋밋해서 거기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뻔한 생각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줄지어 지나갈 뿐 감동도, 웃음도, 몽상도 자아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엠마는 ‘그의 심장에 부싯돌을 문질러보았지만 불꽃이 일지 않는 것을 보자,’ 샤를르를 정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려요.
그래서 엠마는 자신의 낭만을 구현해줄, ‘말을 타고 달려올 기사’를 꿈꾸지요. 플로베르가 어찌나 주도면밀한지, 엠마의 막연한 몽상을 여러 단계를 거쳐 설득력 있게 그려요. 엠마는 현실 속 낭만을 경험하게 되지요! 그 과정이 아주 꼼꼼하게 묘사되어서 플로베르가 한 장면을 쓰는데 수일이 걸리고 『마담 보바리』가 완성되는데 4년 넘는 시간이 걸렸는지 알 것 같았어요. 샤를르와 함께 간 무도회가 화려함을 엿보게 한 작은 불씨였다면, 그 불씨는 레옹에서 로돌프로, 다시 레옹과의 재회로 이어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져요. 낭만의 불이 현실을 집어 삼켜 버릴 정도로요.
이 소설을 의사 부인이 저지른 ‘불장난’으로만 이해한다면 플로베르는 아주 억울할 것 같아요. 그는 『마담 보바리』가 ‘심리과학의 집성이 될 것’이라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일까요? 150년이 넘도록 생생한 고전으로 살아있고 올해는 플로베르가 탄생한지 200주년이 되는 해로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마담 보바리’라는 인물을 창조한 것만으로도 플로베르는 문학사에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말이죠. 다시 보니, 소설 『마담 보바리』는 모든 권태로운 결혼생활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소설이 『마담 보바리』에서 그다지 멀리 나아간 것 같지 않아서요.
‘결혼하기 전까지 사랑을 느낀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응당 생겨나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이러한 엠마의 의문이 낯설지 않아요. 누구나 한번쯤 결혼 후에 맞닥뜨리는 당황스러움이 아닌가요? 말하자면, 감정의 공허. 저는 그랬거든요. 어쩌면 그런 감정이 바로 결혼의 민낯, 소란스러운 결혼식 뒤에 감춰진 진짜 무대가 아닐까요? 엠마는 남편 샤를르를 행복의 방해자로 여기지만, 샤를르는 엠마를 한없이 사랑스럽게 여겨요. 엠마가 로돌프와 레옹과 폭풍 같은 연애를 하는 동안에도 샤를르는 눈뜬 장님처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엠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죠. 습관적으로요. 엠마는 아마 샤를르의 습관적 감정, 단조로운 말에 도저히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을 거예요. 두 사람은 한 번도 진정한 소통을 나누지 못했으니까요. 샤를르는 엠마의 예술적 감성으로 무장된 낭만을 결코 읽어내지 못해요. 엠마가 샤를르의 지루하리만큼 성실한 삶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처럼요. 함께 오페라 감상을 하러 가는 대목은 두 사람의 불통을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줘요.
엠마는 오페라를 감상하며 ‘처녀 시절에 읽은 책의 세계 속으로, 월터 스콧의 세계 한복판으로 되돌아’ 갔다고 느껴요. 엠마는 소설의 기억 덕분에 줄거리를 쉽게 따라가지만 샤를르는 같은 오페를 보면서도 줄거리를 이해할 수 없고 음악이 가사를 듣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요. 반면 엠마에게 음악은 그녀의 전 존재를 전율하게 하는 매개체였는데 말이죠. 두 사람의 차이가 결코 좁혀질 수 없다고 느낀 엠마는 다시 만난 레옹과 대담한 연애를 시작해요. 레옹과 사랑을 나누는 유명한 마차장면 있죠?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플로베르의 실제 경험에서 나왔다고 해요. 평생 결혼 하지 않고 연애만 이어갔던 플로베르였기에 실감나게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어요.
로돌프와의 연애에서 뼈아픈 교훈을 배운 엠마는 레옹과의 만남을 주도하게 되지요. 레옹은 엠마가 자신의 정부가 아니라 자신이 엠마의 정부라고 여길 지경이에요. 엠마는 레옹을 만나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고 사치품을 사기위해 계속 빚을 지게 되어요. 미래가 없고 오직 현재만 사는 사람처럼요. 그렇게 엠마는 ‘생의 쾌락 속으로 몸을 던지고, 성을 잘 내고 굶주린 듯이 먹어대는 사람으로 변했고 음탕’해 져요. 여기서 독자는 알게 되요. 엠마의 낭만은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이라는 것을요. ‘황홀한 키스가 끝나면 입술 위에는 더 큰 관능을 구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의 모습을요.
‘간통 속에서 결혼 생활의 모든 진부함을 그대로 발견’한 엠마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요. 거짓말만 남았을 뿐이죠. 플로베르는 매력 넘치던 여주인공의 마지막을 끔찍하게 그리지요. 감당할 수 없는 빚 때문에 음독자살하는 여인의 모습으로요. 엠마와 뜨겁게 사랑을 나누던 레옹이나 로돌프는 보이지 않아요. 모두 엠마와 거리를 두고 내치기 바쁘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샤를르가 사랑의 모습을 보여줘요. 엠마가 죽은 후에도 그녀의 소장품과 가구를 간직하고자 하죠. 소설 내내 샤를르는 지루하고 매력 없고 둔감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그건 엠마의 눈으로 본 샤를르의 모습일 뿐 샤를르야 말로 진정으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엠마는 샤를르 방식의 사랑과 낭만을 눈감기 직전에야 겨우 알게 되지요. 그토록 사랑했던 엠마가 죽은 뒤에야 샤를르는 엠마의 외도를 알게 되어요. 전 샤를르가 둔감하고 무딘 사람이었다면 그럭저럭 슬픔을 극복하고 살았을 것이라 생각해요. 어린 딸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샤를르는 엠마를 따라 죽을 만큼 낭만적인 사람이 아닌가? 묻게 되어요.
엠마와 샤를르가 낭만으로 추락하는 동안, 반대로 상승하는 인물이 있어요. 약제사 오메. 오메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으로 동네의 모든 소식을 파악하고 적당히 정리해 뉴스로 가공하는 인물이지요. 그는 이해 타산적이고 계산적이에요. 어감이 안 좋지만 오메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죠. 속물성을 숨기지 않아요. 오메의 삶은 날로 윤택해지고 결국 오메가 바라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고 알리며 소설은 끝나요. 엠마와 샤를르가 맞는 죽음이라는 비극과 얼마나 대비가 되는지, 낭만과 현실에 대해 플로베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가 낭만주의 해독제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낭만주의에 있는 독, 이 ‘보바리즘’으로 표현된 것이겠죠. 낭만적 몽상이 현실에 침투하여 현실을 변형시키고,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환상을요. 플로베르는 낭만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며 과도한 낭만의 말로가 얼마만큼 비참해질 수 있는지 낱낱이 까발려요. 플로베르가 도덕적 교훈을 주려고 이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엠마 보바리는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스스로 고백한 플로베르처럼 저 역시도 마담 보바리 안에서 저의 모습을 발견하거든요. 욕구와 욕망의 그림자들을요. 눈앞의 현실보다 저 멀리 닿지 않는 환상을요.
결혼생활이라는 현실에서 어떻게 낭만을 지키며 또 키워갈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낭만이 사라진 현실이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아마도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요? 낭만의 원천이자 낭만적 몽상이 펄펄 살아 숨 쉬는 책은 답이 없는 현실 속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니까요. 비록 불완전한 방법일지라도 그것이 제가 경험한 낭만과 현실이 공존하는 모습이었답니다. 그런데 『마담 보바리』가 보여주듯, 책은 반드시 우리를 안전한 길로만 안내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지요. 엠마가 가진 낭만의 원천 역시 책이었으니까요. 헤븐님, 혹시 낭만을 관리하는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난다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