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결혼의 실험

by 김성민




헤븐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내가 미쳐본 적이 있었나, 어디에 미쳤었나 생각해 보았어요. 중학생 때인가, 라디오를 듣느라 밤을 새곤 했어요. 새벽 두시부터 시작하는 영화음악방송을 매일 빠지지 않고 들었거든요. 모두 잠든 밤에 혼자 깨어서 영화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디제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는 아무도 모르는 세계를 혼자만 알고 있다는 기분 좋은 착각에 빠졌지요. 또래와 비슷하기를 원하면서도 다르기를 원하던 시절이니까, 학교 밖의 세계에 접속하는 시간을 저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고요.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해야 하던 시절이라 빈틈없이 녹음하려면 새벽이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어요. 귀중한 시간과 나의 잠을 바쳐 녹음한 테이프는...정말이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지요. 그 보물을 얻느라 성장기에 중요한 잠을 자지 않은 대가로 저는...그때 자랄 키가 덜 자란 것 같은 의심을 아직도 하고 있답니다. 하하.



요즘은 라디오가 아닌 책을 보느라 새벽에 잠들곤 해요. 학창시절에 새벽에 깨어있는 건 일탈과 죄책감을 맛보게 했다면, 엄마가 되고 난 후 새벽에 깨어있으면 일종의 해방감을 느껴요. 잠시 모든 책임과 역할에서 벗어나 책을 보는 시간. 다음날 아침 피곤한 몸으로 일어나야 하는 부작용이 따르지만, 늦은 밤 책 읽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계속 지키고 싶은 시간이지요. 그러니 제가 미친 듯이 사랑하는 대상이 책인지 아니면 새벽 시간인지 헷갈리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미치도록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이미 경험하고 끝을 알아버려서 그런 걸까요? 무언가에 미쳐있는 상태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다면, 계속 타오르기 위해 어떤 것은 소진되고 태워져야 하겠지요. 그리고 재가 남을 테고요. 나를 아내로, 엄마로 부르는 가족이 있고 나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책임지는 일들이 늘어나다 보니 쉽게 무언가에 마음을 내어주는 경우가 드물어져요. 그러니까 미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보통은 자기 검열이나 방어기제가 작동해서 브레이크가 걸리니까요. 미친다는 건 자기 방어를 넘어선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아닐까요.



지금 제 옆에는 『미친 사랑의 서』라는 책이 있어요. ‘작가의 밀애, 책 속의 밀어’라는 부제가 붙은 101명의 문호들의 사랑을 담은 책이지요. 그들의 사랑에는 브레이크가 없어요. 거침없이 질주하지요. 사랑의 대상이나 방법의 경계를 뛰어넘고 상식을 벗어나요. 책은 그들의 비상식적인 사랑, ‘미친 사랑’을 원동력으로 하여 작품이 탄생했다고 말해요. 격렬한 감정과 강렬한 경험이 그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면 이 책은 그저 가십성의 스캔들을 담은 책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바탕이 되겠지요. 왜 그들은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모험을 감행했을까. 감정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행동에 의문이 들지만, 감정을 최대한 확장하여 경험의 심연과 높이를 탐험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위태로우면서도 용감해 보여요. 어쩌면 진짜 작품은 그들이 남긴 책 보다 그들의 삶 인지도요.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했던가요, ‘내가 쓴 최고의 명작은 바로 내 인생이다.’




보부아르는 평생 ‘결혼한 독신녀’로 살았어요. 장 폴 사르트르와 맺은 계약 결혼을 통해서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1929년 철학교수 자격시험에서 각각 수석과 차석을 차지하면서 운명처럼 만나게 되지요. 실제로 보부아르의 답안이 더 뛰어났지만 사르트르가 남자라는 이유로 수석의 영광이 돌아갔다고 해요. 여기에 대해 보부아르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아요. 사르트르의 지식에 매료된 보부아르는 그를 ‘운명의 동반자’로 여기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했으니까요.



그 이후 두 사람은 날마다 붙어 다니며 열정적인 만남을 이어가요. 같이 논문을 준비하고 지적 자극을 주고받으면서요. 주변사람들이 그들을 부부로 볼 정도로 친밀해지는데 모두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사르트르가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떨어져 지내야 할 상황에 놓여요.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제안을 하지요. “우리 2년간 계약을 맺읍시다.” 처음부터 계약 이야기가 나온 건 아니었어요. 전통적인 결혼에 반대했던 보부아르는 결혼으로 인한 가사노동과 출산이 여성에게 올가미가 된다고 생각했지요. 보부아르는 주부로 사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결심해요. 앞으로 남은 삶은 ‘주부의 생활 대신 나 자신을 글쓰기에 바치겠다.’고요. 그런 보부아르였기에 사르트르의 청혼을 거절 했지만 그가 제안한 계약은 거절할 수가 없었지요. 어쩌면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계약결혼을 시작해요. 새로운 결혼의 실험을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맺은 계약결혼은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서로 허락하는데 동의’해요. ‘다른 사람과 우연히 만나 사랑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서로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조건이요. 그리고 경제적으로 서로 독립한다. 이것이 계약 내용의 전부는 아니지만 계약결혼을 유지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어요. 그리고 무려 50년간(!) 이어져요.



두 실존주의 사상가의 계약 결혼은 사랑에 개방적인 프랑스에서 조차 폭탄 같은 파격이었어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미친 거 아니야?’ 헤븐님의 말처럼, 모든 사랑은 원래 불평등하고 질투와 소유욕이 따라다닐 수밖에 없을 텐데 그들은 사랑의 낭만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신뢰를 시험대에 올린 셈이었지요. 결혼에 대한 맹세라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관계 대신 계약결혼이라는 개방적인 형태로 말이죠.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허락하면서 유지되는 결혼이라니 이보다 더 모순적인 형태가 있을까요?


단순히 모순이라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저 역시도 몹시 모순적이기 때문이에요.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카페라떼를, 안전하지만 불확실한 모험을, 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이성을 동시에 원하듯, 열정과 냉정을 동시에 원하지 않느냐 말이죠. 양립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욕망은 더 커져요. 특히 결혼이라는 현실 속에서 낭만을 원한다면 말이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낭만과 현실을 동시에 껴안기 위해, 같이 살되 홀로 존재하기 위해, 함께하되 책임지지 않기 위해 계약결혼이라는 실험적인 삶을 살았어요.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계약결혼이 파격으로 들려요. 그만큼 시대를 앞서갔거나 아니면 결혼제도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두 사람의 계약결혼은 단순히 결혼 형식을 넘어서 실존주의 사상의 실험의 장이었고 삶이었어요. 나를 보존하면서 우리로 나아가는 길. ‘나와 타자의 주체성과 주체성의 결합, 자유와 자유의 결합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그것이 바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의 핵심’이었으니까요. 귀족가문의 보수적인 전통에서 자란 보부아르에게 계약결혼은 ‘전형적인 여자로서 사는 방식과 그렇지 않은 방식을 실험’이기도 했어요. 가사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텔을 거처로 삼고 아이를 낳지 않아요. 대신 사르트르의 끊임없는 격려 속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제 2의 성』을 낳지요.


계약결혼은 수많은 위기를 겪어요. 왜 아니겠어요. 사르트르의 여성편력과 보부아르의 남성편력 그리고 여러 삼각관계는 끊임없이 계약결혼을 위태롭게 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위협해요. 하지만 한 명이 죽기 전에는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말, 대화,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열정. 말이 통하는 사람, 정신의 정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던 보부아르에게 사르트르는 완벽한 대상이었기에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어요. 사르트르가 만나는 새로운 사랑이 보부아르로 하여금 무시무시한 질투와 괴로움을 느끼게 했더라도 말이죠.



‘시몬느는 풍부한 지식을 가진 남자와 결혼해서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꿈꾸었다. 햇살이 가득 찬 방에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남편과 함께 앉아서 책을 읽고 쓰는 것이 보부아르가 꿈꾸는 이상이었다. (24쪽,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 )



보부아르는 계약결혼의 딜레마를 문학으로 형상화한 소설 『초대받은 여자』를 쓰지요. 소설가가 꿈이었던 보부아르에게 소설가의 명성을 얻게 한 작품이니 질투를 비롯한 감정의 격랑을 감수한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계약결혼은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중력에 저항하고 최대한의 자유를 실현하는 실존주의적 선택이었어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평생 연인이자 지적인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바탕은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사랑. 계약결혼이라는 실험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니면 실패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어떤 실험은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시도 자체가 의미 있는지도 몰라요. 결혼이라는 굴레에서 주체성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새로운 결혼을 보여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두 사람은 불가능에 도전한 사상가이자 발명가 아닐까요 ?





몽파르나스에 있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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