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에 관한 몽상 혹은 단상

by 김성민



프루스트의 시집을 소개해주셔서 반가웠어요.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의 원제목이 따로 있었네요. ‘음악, 슬픔 그리고 바다에 관한 단상들’ 은 아리송한 느낌을 주는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보다 직접적이라서 내용이 투명하게 보여요. 읽고 싶은 마음에 도서관에 갔다가 시집을 찾아봤어요. 그런데 대출 중이어서 어찌나 아쉽던지. 무슨 근거로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결국 주문을 하고 말았네요. 어떤 빛깔을 띠는 음악, 슬픔, 바다에 관한 단상 일지 궁금해요. 사전을 찾아보니 몽상은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하다’는 뜻이고 단상은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이라고 나와요.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말하기보다 몽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그럴듯하게 들려요. 버려지기 아까운, 단상이 될 만한 씨앗을 몽상이 품고 있는 것 같아서요.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은 빌리지 못했지만 다른 책을 잔뜩 빌렸어요. 대부분 한나 아렌트의 책들이에요. 저에게는 언제나 오르고 싶은 높은 산, 한나 아렌트. 높아서 막막해 보이지만 가끔 만나는 시원한 바람 같은 문장이 있어서 계속 오르게 되는 것 같아요. 가령 이런 문장이에요. ‘사랑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마세요.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고 무슨 노래 가사인 줄 알았다니까요? 사랑이라는 말이 넘쳐나고 남발될수록 진짜 사랑을 찾기 어려운 것 같아요. 과연 ‘진짜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궁색한 말들만 늘어놓겠지만, 그런 빈곤한 이해 때문에 여전히 사랑에 대해 묻는 것이겠지요.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사랑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아마 그 이유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 말은 『인간의 조건』 중 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오는데 저의 어설픈 이해에 따르면 아렌트는 사랑을 본질적으로 비세계적이라고 봐요. 두 사람 사이나 가족사랑은 사적인 영역에만 존재해서 공론 영역으로 가면 그 사랑이 파괴된다고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두 영역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렌트는 두 영역을 엄격히 구분해서 세계를 이해했던 것 같아요. 오늘날, 영화 트루먼쇼나 미셸 푸코의 판옵티콘처럼 CCTV 감시가 일상화된 세상을 보면 아렌트가 어떤 말을 할지 몹시 궁금해져요. 어디까지가 사적이고 공적인지 구분이 더욱 어려워졌으니까요.



아까 도서관에 갔다고 말했는데 저는 동네 도서관에 가는 걸 좋아해요. 편안한 카페도 있지만 도서관이야말로 혼자면서 함께 있는 곳, 사적이면서 공적인 공간이 아닌가 싶어서요.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아담한 시립도서관으로 30년 넘은 외관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곳이에요. 도서관 정원은 익숙한 손길로 단정하게 잘 손질되어 있고 길고양이들도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자주 나타나요. 입구에는 고양이들을 위한 음식이 항상 놓여있죠. 도서관이 지니는 마음이랄까요. 고양이 한 마리 내치지 않고 품어주는 너른 마음을 느껴요.


열람실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면 열중해 있는 눈빛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온전히 빠져든 눈빛에 묘한 감동을 받지요.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분들의 특징은 늘 같은 자리에 앉는다는 점이에요. 동요하지 않고 책에 열중한 모습,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아요. 그중에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안경을 코에 걸치고 책을 읽으시는데 얼굴 주름이 오랫동안 책을 읽어온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죠. 독서에 필요한 주름으로 만들어진 얼굴이랄까요. 뒷모습이 커다란 산처럼 보이기도 해요.



도서관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동네에서 제일 멋진 목련나무를 볼 수 있어서예요. 목련 봉우리가 얼굴을 내밀고 목련꽃잎이 떨어질 때 봄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지요. 가을이면 가장 예쁜 단풍의 모습을 볼 수 있고요. 숨 가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쉼표 같은 곳,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고 생각의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는 곳. 그래서 저는 집을 두고 일부러 밖에 나가 도서관에 다니나 봐요.




도서관에서 바라본, 고양이가 있는 풍경





어떤 장소는 기분을 창조해요. 기분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지요. 잠들어있던 세포들이 깨어나는 느낌이 드는 곳이 있어요. 도서관에 빽빽하게 꽂힌 책들이 저를 압도하지만 한편으로는 무한한 에너지를 전달받는 것 같아요. 헤븐님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겠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요. 소진된 의욕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환경을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당장 바꿀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렵다면 집안 정리나 가구 배치를 바꿔보는 것도 도움이 되어요. 집안 정리가 마음 정리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어쩌면 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어요. 먼저 시간이 확보되어야 장소에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로 일 년 동안 거의 잠을 못 잤어요. 그때 한두 시간 자고 깨는 생활의 반복이어서 통잠 자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는 마음이 솟구칠 때였고 심신이 걷잡을 수 없이 약해져 있었어요. 우울증 진단을 받을 만큼. 그 해 생일 선물로 무얼 원했는지 아세요? 시간을 선물 받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24시간이요. 통잠을 잘 수 있는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요. 운 좋게도 24시간을 선물 받았고 홀로 24시간을 보냈어요. 막상 시간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자 허둥지둥 시간을 무참히 흘려보냈지만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주는 충족감이랄까요. 그런 충족감이 모질고 뾰족하게 날 선 마음을 둥글게 해 주었던 것 같아요. 잠시라도 나의 시간을 주도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느낌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무엇을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 의욕은 공간과 시간을 먹고 자라는지도 모르겠어요. 생각해 보면 제가 느끼는 의욕은 무언가를 시작할 때 충만해져요. 시작은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기에 막연한 설렘이 있죠. 그러니까 의욕은 첫 마음인 셈이네요. 관건은 어떻게 첫 마음을 유지하느냐 이겠지만... 여행보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영화 보다 영화 보러 갈 때, 맛집보다 맛집에서 메뉴를 고를 때, 책 보다 책 구경할 때, 그리고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을 때!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이 도착했어요. 편지를 중반까지 쓰고 이어서 쓰는 사이 고맙게도 와있더라고요. (배송의 세계는 정말 놀랍습니다.) 시집을 빼곡하게 음미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눈에 띄는 몇 가지 인상을 우선 전할게요. 먼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그림. 그림이 시의 일부처럼 어우러져요. 읽어보니 프루스트가 휘슬러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네요.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오팔빛 황혼: 트루빌> (1865)



바다는 프루스트에게 영감을 준 것이 틀림없어요. 원제가 ‘음악, 슬픔, 바다에 관한 단상들’인 만큼 프루스트는 바다에서 음악과 슬픔을 동시에 보았겠죠. 그리고 사랑을요. 파도타기가 사랑이 만들어내는 격동이고 물거품으로 흩어지는 파도가 지나간 사랑의 슬픔이겠고요. 하지만 파도가 다시 밀려오듯 새로운 사랑도 다가올 것이라고 프루스트는 보았어요. 그에겐 바다가 사랑이라는 음악, 아니었을까.



의욕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이라면 그 무엇을 향한 사랑이 의욕에 감춰져 있는 것 같아요. 의욕의 원동력은 사랑. 그렇다면 의욕 역시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듯 그렇게 움직이겠어요. 의욕이 고갈된 누군가를 보면 말해주고 싶어요. 의욕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생각해 보면 의욕을 갖고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보다 이루고자 하는 과정 속에 빛나는 순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빛은 잠깐 스치듯 지나가지만 그 빛의 순간 때문에 지속할 수 있는 것이겠죠. 빛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에게.



인생이란 상상 속의 애인과 같은 것. 우리는 그녀를 꿈꾸고, 그녀를 꿈꾸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그녀를 실제로 체험하려 애쓰지 말 것. ( 프루스트,「꿈으로서의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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