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꽃 Sep 10. 2024

서이초 후배를 추모하던 날

교사라면 누구나 

  2023년 7월 21일 쓴 글

  

  2023년 7월 말 여름, 후배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강남서초교육청에 다녀왔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르고 숨이 막히는 여름이었다. 매해, 이번 여름은 평년보다 훨씬 더울 거라고 언론이나 광고에서 얘기하는데 그해 여름은 정말 평년보다 훨씬 더웠다. 밖에 나가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그 더위에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걸어서 어디를 간다는 것은, 하아……. 그냥 나갈 일을 만들면 안 된다. 그러나 아무리 더워도 미루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후배의 죽음을 추모하는 일. 그것은 덥고 귀찮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검은색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섰다. 백팩에는 읽을 책과 물 등 소지품이 가득 들어있어 무거웠다. 너무 더울 경우, 카페에 들어가 휴식을 취해야 하므로 카페에서 읽을 책도 무겁지만 챙겼다. 목적지인 서울시교육청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내려서 지하철로 갈아탔다. 갈아타기 위해 밖에서 15분가량 걸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에서부터 약 30분 동안 또 걸었다. 땀이 줄줄 흘렀다. 오르막길을 걷는데 등산을 하는 기분이었다. 잠시 돈의문박물관 마을안내소에 들어가 물을 마시고 땀을 식혔다. 나가기 싫었지만 다이어트한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겨우겨우 서울시교육청에 도착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어쩐지 입구부터 너무 조용했다. 추모 공간이 있을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건물로 들어가서 “서이초 선생님 추모하는 곳 여기 없어요?”하고 물으니 직원은 무표정하게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아니, 이럴 수가……. 알고 보니 추모장소는 강남서초교육청이었다! 나는 힘들어 쓰러질 것 같은데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이곳은 추모 장소가 아니라고 말했다. 사무적으로 대답하는 직원에게 괜히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강남서초교육청이라면 우리 집에서 바로 지하철을 타고 갈아탈 필요 없이 더 빨리 갈 수 있었다. 


  아……어떡하지? 여기까지 온 이상 포기할 수는 없었다. 버스를 타고 강남방향으로 이동해야 했다. 온 길을 다시 되돌아 헉헉 거리며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기사님께 “이 버스 강남역 가요?”하고 물으니 반대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 다시 한번 한숨과 짜증이 몰려왔다. ‘그냥 집에 갈까?’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푹푹 쪄서 터질 것 같은 더운 날씨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두 시간 넘게 헤매고 다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건너편을 바라보며 버스정류장이 어디에 있나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땀은 줄줄 흐르고 있고 가방은 무거워서 어깨도 아팠다. 바보처럼 추모 장소도 모르고 땡볕에 돌아다니는 내가 한심했다. 기운은 다 떨어졌고 정신력으로 걷는 중이었다. 그때 ‘강남면옥’이 보였다. 나는 외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는 대단한 짠순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 때는 아무리 짠순이라도 밖에서 냉면을 사 먹어야 했다. 안 그러면 쓰러질지도 모른다. 힘차게 냉면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원한 가게에서 차가운 물냉면을 먹고 나니 다시 걸어갈 힘이 났다. 냉면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강남역 부근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내려 약 15분을 걸었다. 가는 길이 오르막인 데다 길도 좁고 중간에 공사도 하고 있었다. ‘혹시 여기 아닌 거 아니야? 내가 또 뭔가 착각한 건가? 여기가 아니라면 다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초조해졌다. 다행히 골목 모퉁이를 도니 교육청이 보였다! 맞게 찾아왔다. 집에서 나온 지 거의 4시간이 다 되어서야 추모장소에 도착했다.   

  

  강남서초교육청 입구 바로 왼쪽에 방문객을 맞이하는 분들이 서 있었다. 그곳에서 추모록을 작성했다. 제단 앞으로 가서 바닥에 백팩을 내려놓았다. 제단은 교육청 정문과 건물 입구 사이 바깥에, 건물을 바라보고 오른쪽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왼편 다른 한쪽에는 기자들, 교육청 관계자들, 방송국 취재단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얀 국화를 하나 들고 제단 앞에 놓았다. 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어……? 그런데 이상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통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선배교사라면서 근무환경을 악화시킨 것 같은 죄책감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이곳에 왔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마음속 깊이 좋아했던 분의 장례식장에서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걸까. 그대로 더 서있다가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 몸을 움직였다. 언론 부스 옆 천막 아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거기 앉아 물을 마셨다. 방송국 브이제이라는 분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할 말이 많았기 때문에 흔쾌히 응했다.


  ‘나는 이 일이 그렇게 놀랍지 않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죽음도 많을 것이다. 실제 현장에는 예의 없고 폭력적인 아이들, 이기적이고 비상식적인 보호자들이 많다.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교사들도 많다. 인권이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거 아니냐. 교권은 그다음이다. 교권은 고사하고 인권은 어디 갔나? 학생의 인권만 찾지 말아 달라. 교사의 인권도 똑같이 중요한 거 아니냐.’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말했다. ‘저 위에 놈들 안 바뀐다고, 지금 이 난리가 났으니까 그냥 뭐 하는 것처럼 하지 안 바뀔 것 같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교육청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누가 온 것 같았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고 카메라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쪽을 등지고 있던 브이제이에게 저기 누구 온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얼른 카메라를 들고 뛰어갔다. 이주호 부총리는 조객록을 작성하고 헌화했다. 사람들이 부총리님 오셨냐며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관계자들은 부총리를 교육청 안으로 모셨고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안으로 들어갔다.    

   

  서이초 교사의 제단 앞에 꽃을 놓으며 눈물이 글썽였던 것은 이 일이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남이 아니라 내가 겪을 수도 있었던 일이었고, 바로 옆 반 교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숨이 막히게 덥고, 백팩을 멘 등이 땀으로 젖고 어깨가 아팠지만 이곳까지 내가 꾸역꾸역 온 이유다. 밖에서 밥 먹느라 돈 쓰는 걸 싫어하는 내가 밥까지 사 먹으면서 꼭 와야 했던 것이다. 학교에서 고초를 겪는 선생님들을 매해 봐왔다. 누구든 그녀처럼 막다른 골목에 몰릴 수 있다는 것을 모든 교사는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그녀 곁에 누가 있었을까. 그녀는 스스로 세상을 떠났고 동료교사들은 다시 출근하고 학생들은 다시 학교에 다닐 것이다. 나도 금방 잊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책임 있는 사람들도 각자 자리에서 다시 일을 하고 일상을 살 것이다. 부총리라는 분도 지금은 언론 앞에 나와 통감한다, 바꾸겠다고 말하지만 어느 때부터 언론에서 이 이슈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고통을 겪고 유명을 달리했어도 실상 크게 변하는 것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체념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혼자서 괴로워했을 어린 교사를 잊지 않고 싶다. 교사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오랫동안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이전 10화 교대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