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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Apr 29. 2020

여백의 미

비워둠에 관하여


'그는 그 부분을 굳이 그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한층 부각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책에서 그렇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자 마음먹기 전에는 물론이고, 무엇을 하고자 마음을 정한 뒤에도 모든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가리지 않고 익히고 얻고 받아들이고 사귀고 수집하는 시간들을 많이도 보냈다.

마치 잡식동물이라도 된 것 마냥 일이든 사람이든 부탁이든 조언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적어적 씹어 꾸역꾸역 삼켜가며 나의 자양분으로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렇게 과식을 하고 나니 결국 안에서 탈이 나기 시작했고,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간직해왔던 것들을 하나씩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뱉어내는 순간에도, 얻고자 했던 것들을 포기하는 건 아닐까 싶어 손으로 주워 담아보려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가는 유•무의미한 것들을 지켜보는 일밖에 없었다. 더 이상 나의 소화능력은 어린 시절 같지가 않았다.
마음이야 건강을 유지해 다시 또 열심히 섭취하고 싶지만 몸이고 마음이고 따라주질 않는 것이다.

인간의 현실은 영 희망 같지가 않아서 예전엔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아 시간을 쪼개고 쪼개 하루에 몇 군데씩이나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배우고 익히다 보면 만능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정작 시간이 지나고 나를 돌아보니 다양한 것들을 얼마만치 하는 평범하고 특색 없는 인간이 되어있었다.

그러고 나서부터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정말 마음이 가서 몸이 자연스레 따라가는 일을 하며 살자고.

나는 열 가지 일을 다 수월하게 해낼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님을 인정하고 한두 가지 만이라도 제대로 해내는, 다른 건 다 못 해도 이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잘 해내는 인간이 되자는 마음으로.

하지만 덜어내는 일 중에도 쉽고 어려운 것이 나뉘어 있는데, 일이나 물건이야 내 마음대로 포기하고 내다 버릴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유대감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내 삶에 방해가 된다 한들(열 번 도움이 되고 한 번 크게 방해가 되는 경우도 해당된다) 일방적으로 접어두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나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꽤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편인데,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리라.

어찌 됐든 일이고 물건이고 사람이고 한 동안 덜어낼 만큼 덜어냈다 싶은데도 아직도 벅찬 느낌만 가득하다.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내 곁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걸까.
이렇게 한 해 한 해가 지나 나이가 들다 보면 결국 나도 어른들처럼 외롭고 고독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걸까 싶은 두려움도 든다. 그래도 무엇 하나에서는 작게나마 인정받고 스스로 흡족해할 만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오늘 하루도 여백을 만든다. 덜어내는 하루를.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을 한층 부각하기 위해서.

-201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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