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모운 Feb 03. 2022

신병

  12월부터 촬영을 시작한 드라마 일정이 얼마 전 모두 끝났다. 병영드라마다 보니 배우들 나이가 대부분 비슷하기도 하고, 팀워크를 중요시하는 톰 감독님(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지만 레이벤 선글라스를 쓴 감독님을 보고 나 혼자 <탑 건>의 톰 크루즈 같다고 말한다) 덕에 많은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건 그 누구 하나 큰소리치지 않는 화목한 현장 속에서 30회 차의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촬영 초반엔 세트 촬영으로 합숙할 일이 많았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촬영을 하고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밤에는 모여서 다음 날 촬영분을 연습했다. 서로 아이디어를 내고 애드리브도 준비해보고 연습이 끝나면 각자 방에서 개인 연습을 하는 소리가 객실 벽 너머로 들렸다. 

  몇 페이지에 달하는 길이의 씬들이 몇 개씩 있어 롱테이크로 촬영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나는 말년 병장 역할이다 보니 크게 개입하지 않아 배우들이 열연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르듯이 속으로 대사를 따라 하곤 했는데, 내 대사는 없었지만 배우들의 많은 연습량으로 인해 각 씬의 대사를 거진 다 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날이 갈수록 신기해졌다. 준비를 많이 했고 안 했고를 떠나서 촬영장에선 다양한 실수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누구 하나 NG를 내지 않았다. 물론 감독님께서 생각해두신 방향에 맞춰 한 번 더 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이 잘못됐다는 싸인은 없었다. 그런 과정에는 배우들이 연극과 같이 긴 씬을 실수 없이 해결하려는 노력과 연습이 있기도 했지만 대개 감독님을 필두로 스태프들과 제작진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편하게 움직이고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도록 카메라가 움직여준다거나 편집점을 예상하고 배우가 원하는 만큼 연기할 수 있게 해주는 일로 배우들은 연극 무대 위에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배우들은 신인 위주로 구성됐음에도 주눅 들지 않고 각자의 기량을 뽐낼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촬영할 때는 작품에 관해서, 촬영이 끝나고 나서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자주 대화 나눌 수 있었다. 연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 연기를 하면서 즐거운 점과 힘든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하고 있는 이유를 나누며 캔맥주를 마셨다. 개인적 상황이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작품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속감으로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스물다섯부터 서른여섯이 넘는 배우 간의 나이 터울도 있었지만 괜한 충고를 늘어놓는 어른도 없었고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는 동생도 없었다. 그저 한 팀처럼 움직이고 서로가 먼저 배려하고 양보하며 좋은 순간들을 연속적으로 만들어냈다. 

  혹자는 작품이 잘 되어야 배우들도 돈독해지고 그 시간이 길어진다고 말한다. 물론 작품이 잘 돼 배우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 다음 스텝을 순탄하게 밟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된다면 제일이겠지만, 이런 현장에 있다 보면 마치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과 여행을 마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 기분이라 헛헛해진다. 아직 여행기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함께 한 여정이 어떻게 담겨 나올까 기대가 크다. 

  예술가에게 과정이 결과물이 되어 창작되는 일은 마치 생명체의 탄생과 같이 감격스럽다. 수십 명의 철학과 사유가 겹겹이 쌓여 뭉치고 깎아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이 되는 일이 어찌 조화롭지 않을 수 있을까. 작품의 결과가 어찌 되든 최선을 다 했다는 말로 결말을 기다린다. 멋진 전역식을 기다리는 신병의 마음으로. 

작가의 이전글 사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